2017. 8. 22. 23:54

 “[모든 일은 그 일에 얽혀 있는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엮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완전한 우연이란 없다. 결과는 우연으로 보일지라도, 모두 인간의 의지나 행동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날, 내가 그 호텔에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괴도 블루가 그 날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를 노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나도 그도 모두 스스로의 의지로 그 곳에 존재했다.] <푸른 그림자를 뒤쫓다> 1편 첫 부분이군. 그래, 조회수가 얼마나 나온 거지? 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1973만. 곧 2천만이 넘는댔어.”

 “일본 인구가 1억, 그 중 2천만이 보다니. Brilliant! Congratulation! 팬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읽었어?” 

 “Of course! 나와의 조우를 블로그에 올렸을 때부터. 댓글도 꽤 열심히 달았는데, 못 보았나 보지? 아,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따위는 넣어 둬. 소송에 걸릴 일은 없을 거야. 그래, 물론 다른 이들의 경험담도 보았지. 블로그, SNS 뿐만 아니라 신문도 잡지도 유튜브도 TV 방송도. 하지만 그대의 경험담은 차원이 달랐다. 문체가 정돈되어 있고, 냉정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듯 해도 열정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달콤하고, 순수함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어.”

 “관심종자야? 자기 목격담을 다 찾아보고 있게?”

 “세상에 정의의 빛을 뿌렸다면 그 빛이 어디까지 닿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지지 않나? 나에 대해 쓴 책은 다 읽어보았지. 그 중에서 그대의 책이 단연 최고였어. 물론 나라는 소재도 충분히 좋았지만, 나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글이야. 자네의 이전 작들도 읽어 보았어. 고양이 탐정 시리즈이던가? 정말 재미있던데. 그것도 최근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면서? 대단하군. 그대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

 “훔친 건 아니지?”

 “Non, non. 그런 서운한 말은 그만 둬. 훌륭한 책에는 경의를 표해야지, 제 값을 치르고 사는 걸로. 이걸로 답이 되었나? 그렇다면 베스트셀러 작가, 이번에는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차례인 것 같은데.”


 검은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벽을 훑었다. 그 아래에서 신문지가 바슥대며 움직이고 인쇄용지가 빠득대고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미끄러졌다. 크게 인쇄된 글자마다 괴도 블루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사진은 모두 구도와 장소가 달랐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만큼은 같았다. 파란색 스팽글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검은 실크햇, 같은 파란빛의 안감으로 빛나는 검은색의 망토, 어깨에 흐트러짐 없이 달린 타조 깃털 수십 장, 몸에 잘 맞는 검은 슈트와 파란색 셔츠, 그리고 장식으로 푸른색 코사지. 얼굴은 항상 흔들리거나 멀리서 찍혀 명확하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만은 똑똑하게 보였다.


 사진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모습의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등 뒤에는 벽의 3분의 1 정도를 꽉 채우고 있는 커다란 포스터가 있었다. 풍선 수십 개와 작은 크기의 애드벌룬 두어 개에 매달려 보름달을 향해 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손만 뻗으면 당장 사진을 끌어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굵은 눈썹이 꾸물거렸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이 파랗게 빛났다.


 “어째서 이 방에…. 나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모여 있는 거지?”


 사면이 종이와 사진으로 가득 찬 서재의 한가운데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는 올바른 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경시청에 외부 전문가 자격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모두 괴도 블루가 일으키는 절도 혹은 절도 미수 사건이었다. 괴도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으니까. 답을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답을 알면서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까? 밀리언셀러 작가 마츠노 이치마츠는 다시 한 번 방 안과, 벽에 붙은 신문기사와, 사진과, 사진에 기대어 선 괴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일까?”



***



 그 날 이치마츠가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의지였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이치마츠가 속한 작은 삼류(아니, 십류 쯤 될 것이다) 출판사에서 간판 작가의 증쇄(수상도 아니고, 증쇄)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간판 작가님께서는 오지 않는 작가의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뉘앙스로 초청장을 돌렸고 담당자의 통곡에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가야 했다. 파티는 삼류 출판사답지 않게 호텔에서 열렸는데, 아마 증쇄로 벌게 될 돈의 10% 정도는 여기서 다 해 먹을 거라고 이치마츠는 예상했다.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 구석에서 뷔페 음식을 야금야금 싸놓고 있던 이치마츠의 눈에, 묘한 게 눈에 띄었다.

 그 때 그냥 모른 척 했어야 했는데.

 왜 따라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 보니 호텔 본관 뒤편의 작은 정원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추위에 강한 몇몇 종들은 닳아빠진 푸른색으로나마 버티고 있었고 무엇보다 군데군데 꽃을 품고 선 매화나무는 볼 만 했다. 건너편의 별채에서도 무언가 파티가 벌어지는 듯 시끄러웠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삼류 출판사 간판작가라며 거들먹거리는 녀석, 그 옆에서 아양 떠는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 여기 왜 왔지, 자리를 비웠다고 난리난리 치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 

 그리고 웬 남자와 마주쳤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그 남자와.

 어둠과 어둠을 뚫고 흐트러지는 벌건 빛 속에서 그만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실크햇의 장식이나 가볍게 흔들리는 망토의 안감은, 햇살 아래에서라면 분명 과해 보였겠지만 어둠 아래에서 보니 제법 영롱한 파란색이었다. 평소에 쉽게 입을 만한 옷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걸 입혀놓고 있자니 왠지 잘 만들어진 조각상 같기도 했다. 이유는 몰라도 시선을 뗄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훑어보는 사이 상대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깜짝이야. 사람인가? 사람이야? 사람이 저런 옷을 입고 다닌다고? 가장 무도회인가? 가장 무도회라도 저딴 식으로는 안 입겠다! 솔직히 저거 너무 반짝인다고! 저딴 천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 거람? 이치마츠는 멍하니 알지도 못하는 원단 가게 사장을 욕하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저 안대. 아까 지나가던 호텔 고용인이 하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분명 해적 복장을 하고 있었지, 이 호텔 어디에서 그런 이벤트를 하나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왔고….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이 빙긋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그의 옷에 매달려 쉴 새 없이 번쩍이는 파란색과 비슷해 보였다. 감정은 알 수 없지만 눈도 뗄 수 없는 그런 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나를 찾아내다니. 그대는 어디에서 나타난 재야의 고수이신지?”

 그제야 이치마츠는 묘하게 이 호텔에 사람이 적은 것, 하지만 여기저기 경찰이 서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래서였구나! 바보같이, 왜 그런 걸 몰랐지? 편집부 멍청이들은 왜 이런 날 이 호텔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한 거야? 그야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랬겠지!

 괴도가 물건을 훔쳐가겠다고 예고를 날린 호텔인데!

Posted by *루미*
2017. 3. 2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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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2. 00:39

스팀펑크 AU/ 기계 기술자x현상금 사냥꾼


* 구두예약 샘플용으로 앞서 올린 1~2편을 모두 모아 놓았습니다. 1~2편을 읽으신 분들은 굳이 안 보셔도 됩니다.

* 퇴고 전이므로 샘플의 내용과 실제 동인지의 내용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었냐?”


 발끝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카라마츠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손을 쥐었다 손가락을 멋대로 펴고 접으며 알 수 없는 수신호를 보내는 모습에 이치마츠는 바로 다음 행동을 확실히 정했다. 그리고 손에 닿는 것들 중 가장 무거운 것을 집어 들었다. 묵직해진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일격에 확실히 성불시킬 만한 곳을 눈으로 가늠하고 있으려니 카라마츠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있는 힘껏 여유가 있어 보이려 노력하던 카라마츠는 자신의 머리를 노리는 둔기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치뜨며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노노노노노노농 이치마츠, 이치마츠으? 나는 분명히 생명의 끈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신호를 보냈을 텐데?”

 “기다려 봐. 더 확실하게 죽여 줄 테니.”


 이치마츠는 둔기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확실히 급소를 노리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공중에서 팔이 멈추었다. 허둥지둥 둔기를 양 팔로 받아낸 카라마츠가 그것을 얌전히 옆으로 밀어내었다. 표정은 그저 황망해 보였지만 힘만은 황야에서 날뛸 때 못지않은 모양이었다. 이치마츠는 못 이기는 척 둔기를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장비가 좀 필요할 것 같다. 만들어주지 않겠나?”

 “이번에는 어떤 놈이냐, 오소마츠는 아닌 것 같고. 이야미?”

 “천연 노을석을 발견했다.”


 이치마츠는 무심코 카라마츠의 멱살을 붙들었다. 카라마츠가 이제는 거의 울 듯 한 표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노을석, 심지어 천연 노을석. 본명은 따로 있지만 맑은 여름날의 노을을 담아 놓은 모양새라 모두 노을석으로 부르는 광물은,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높았지만 영구 기관의 연료로 더욱 유명했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물속에서는 끊임없이 불타오르며 증기를 만들어내는 이 돌 근처에는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제국조차도 이 보석을 얻기 위한 셀 수 없는 전쟁 속에서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다행히 이후 제국 최고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누군가가 인공 노을석의 합성법을 알아낸 덕분에 오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인공 노을석은 아쉽게도 수명이 정해져 있었다. 제국 유수의 과학자들이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지만 1년에서 10년으로 늘린 정도였다. 덕분에 물만 있으면 영구적으로 증기를 만들어내는 천연 노을석에 대한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 노을석을 찾아냈단 말이지, 천연으로. 성능이 덜한 인공이 존재할수록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엄지손가락만한 것 한 덩이만 있으면 이 공방 건물과 속의 기구들을 완전히 새 것으로 바꾸어버리고…아니지 일 따위 안 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지. 주먹 정도 되는 것이라면 삼 대는 먹고 살 수 있을 테고. 순식간에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한 이치마츠는 아직도 손에 붙들려 있는 카라마츠를 잡아 흔들었다.


 “언제어디서몇시몇분얼마나? 크기는?!”

 “최근 오소마츠가 이 근방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깊고 깊은 산 속,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자연의 비경 속 깊은 동굴을 나는 찾아내고야 말았지. 동굴 속에 혹시나 숨어 있지 않을까 싶어 어둡고 습한 동굴 속을 헤치고 들어간 그 끝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노을석이! 그것은 마치 그날의 첫 번째로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찬란함이었다. 강렬한 반짝임에 내 의식은 한동안 그 포로가 되어 있었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내 팔뚝만 했다. 하지만 돌 속에 파묻혀 있어서 실제 크기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에는 내 손에 든 것이 너무 없더군. 서운하지만 일단 그 자리에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온전한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채굴 장비가 필요하겠군, 한 번도 보지 못한 보석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이치마츠는 습관처럼 둔기를 바닥에 툭툭 찧었다. 묵직한 소리에 카라마츠가 어깨를 슬쩍 떨었다.


 “그래서, 비공정은 왜 박살이 난 거야?”

 “그 이야기도 이제 막 하려던 참이다! 아름다운 보석의 찬란한 모습을 기억하며 나의 페가서스-와 함께 푸른 하늘을 내달리고 있었지…. 바람은 쾌적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으며 아아아아아알았다 그것 좀 내려놓으면 안 될까? 결론만 말하지. 가다가 마주쳤다. 오소마츠와.”


 이번에는 멱살을 놓았다. 아니 놓쳤다. 세상에, 이 녀석 여기 잘못 온 거 아냐? 차라리 저 광장의 점집 할머니에게 가서 이 달의 운세라도 보고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분명 답은 둘 줄 하나겠지, 운이 아주 제대로 틔었거나 쫄딱 망하거나.

 제국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무법자는 최초로 지명수배 된 이후로-고위 귀족의 고급 자동차를 껍데기만 들어다가 고물 차에 씌워 버렸다고 한다-남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죄들을 저질러 가며 꾸준히 유명세를 쌓았다. 그 때만 해도 제국 측에서는 처리에 골치가 아픈 그저 그런 망나니 경범죄자 정도로만 여겼다. 사실 제국 대학 담벼락에 당당하게 자기 사인을 한 거대한 남성 성기를 그려놓거나(솔직히 대단히 못 그렸다), 경찰청장 집에 숨어들어가 모든 방문 손잡이에 접착제를 발라 놓는 짓은(그 일이 꼬리를 물어 경찰청장은 불륜을 들키고 이혼 당했다) 꽤 악질적인 장난이기는 해도 중범죄로는 취급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몇 번의 경범죄 혹은 장난질 끝에 이 난봉꾼은 대단한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황제의 생일 파티에 올라갈 케이크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싸구려 케이크와 바꿔치기 한 것이다. 황궁의 보안이 뚫렸다는 소식에 온 나라는 발칵 뒤집혔고, 동시에 그 삼엄한 보안을 뚫고 했다는 일이 황제 암살이 아니라 고작 케이크 바꿔치기라서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오소마츠의 목에는 당시 시점으로 제국 최고의 현상금이 매겨졌다. 그리고 그 현상금은 오소마츠가 뭔 일을 벌일 때마다 점점 신기록을 경신해, 지금은 오소마츠만 잡아도 죽을 때 까지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카라마츠 같은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포획 0순위이다.


 “그 녀석, 역시 만만치 않더군.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몸의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우리의 사이가 멀고도 멀었지만 결국은 남자답게 주먹을 맞대어 진심을 보였지. 그 와중에 망가진 거다. 막판에 총을 집어던져 엔진을 맞추는 통에 결국 비상 착륙을 할 수 밖에 없었지. 녀석의 비공정도 꽤 많이 망가져서 잘만 하면 잡을 수 있었는데.”


 온 사방이 적인데도 오소마츠가 잘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말로 전투에 익숙하고 운까지 좋기 때문이다. 카라마츠 뿐만 아니라도 현상금 사냥꾼은 많았고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도 거금에 관심 있는 사람은 더 많았다. 장난질의 수십 배 정도 되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오소마츠는 지치지 않고 모든 포획 시도에서 벗어났고 그 과정에서 피해액은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현상금은 또 올라가고 그를 노리는 사람은 더욱 많아지고. 악순환이다.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얌전히 잡히는 게 나을 텐데. 물론 내 손에. 


 “둘 중 하나만 손에 넣어도 인생 펴는 거군.”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저 빛나는 노을석처럼 우리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 이치마츠여!”


 어깨를 감싸오는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카라마츠가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였지만 곧 활력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치마츠의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치마츠도 필요해.”


 가슴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 멍청한 자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굉장한 말을 꺼내고는 했다.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다잡을 수 없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속으로 정확히 다섯을 센 후, 이치마츠는 퉁퉁 튀기 시작한 심장을 억누르며 되도록 평온하게 대꾸했다.


 “해 본 적 없어, 동굴 속 채굴은.”

 “하지만 야외 발굴은 해 보지 않았나. 그 때 식수원 바로 옆에 붙어 있던 고대 오파츠를 멋지게 발굴해낸 거, 기억하고 있다. 이치마츠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한 번도 안 해 본 일인데 다 할 수 있을 것 같잖아. 망할. 하지만 말을 돌릴 힘은 없었다. 카라마츠가 고물덩이가 된 페가서스인지 뭔지를 끌고 이 공방에 굴러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돈 때문이야. 돈. 당연히 돈 때문이라고.


 “…얼마로 나눌 거야?”

 “5:5. 장비 대여료와 비공정 수리비, 그리고 완성 될 때까지의 숙식 포함. 괜찮지 않은가?”


 사실 대단히 후한 편이었다. 제국법은 발견자 쪽에 더 큰 권리를 부여하도록 지정하고 있었으므로, 카라마츠가 9:1을 불러도 이치마츠는 거절할 길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부르면 당장 공방에서 내쫒았겠지만.


 “좋아.”


 이치마츠의 눈치를 멀뚱히 살피던 카라마츠가 방긋 웃었다. 그 바보같이 말간 미소가 굉장히 심장에 좋지 않았다. 거의 헐벗다시피 한 옷 꼬락서니로 내려가면 더욱 기가 막혔다. 찢어지고 헐어서 먼지투성이라니, 도대체 뭔 짓을 하면서 황야를 뒹굴고 다닌 건가. 도대체 둘이서 무슨 몸의 대화 같은 걸 나눴다는 거야. 그야 뭐 주먹다짐 좀 하고 총이나 좀 쏘고 그랬겠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해 가며. 그러면 오소마츠 그 자식은 카라마츠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꼴을 봤다는 건가. 아니 직접 만든 거나 다름이 없겠네. 생각해보니 꽤 울컥했다. 제아무리 제국 최고의 현상금을 목에 건 수배범과 제국 최고의 보석이 걸려 있대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했다.


 “일단 지금 당장 씻어. 거지꼴이잖아.”

 “샤워장부터 빌려주는 건가? 고맙다. 역시 이치마츠야.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채는군.”


 아, 진짜! 이치마츠는 뒤통수를 박박 긁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물론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말로 정리하는 사이, 카라마츠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샤워장으로 걸어갔다. 따라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샤워하는 소리까지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추적을 시도하는 대신, 이치마츠는 옆에 놓인 둔기만 열없이 걷어찼다. 솔직히 좀 아팠다. 정신이 들 정도로.

 



***




 고철덩어리 쪽에 한없이 가까워진 비공정을 창고에 밀어 넣고 돌아오니 카라마츠가 간이침대 위에 앉아 홀로 낑낑대고 있었다. 자신 쪽을 향한 등이 전구 아래에서 허옇게 빛났다. 약은 또 언제 멋대로 꺼내 놓은 건지. 그야 약상자를 사다 놓은 건 카라마츠이니 별 수 없지만. 언제 사다 뒀더라, 아마 일 년쯤 전이었던가. 공방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었는데 집에 약이 없었고 있는 거라고는 뒹굴고 있던 카라마츠 뿐이었지. 약을 찾아 허둥대던 카라마츠는 그런 거 없어, 라는 이치마츠의 말을 듣자마자 당장 이치마츠를 업어들고 병원으로 달렸다. 다행히 흉터는 심하지 않아 금방 사라졌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치마츠, 자신을 소중히 해라, 라고 잘라 말하던 목소리와 온통 굳은 채 눈빛만 어지러이 흔들리던 그 얼굴을 잊으려 해야 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범죄자를 잡다 칼빵 맞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는 녀석이 겨우 남의 화상 따위에 기급을 해 벌벌 떨다니 웃기지 않아?


 “미안하지만, 도와주지 않겠는가. 등에는 팔이 닿지 않는군.”


 그리 밝지 않은 불빛 아래에서도 등에 새겨진 오래 된 흉터들이 생생했다. 그 중에서 유독 발갛게 부풀어 오른 새 상처가 눈에 띄었다. 제법 강한 찰과상 정도이니 이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붓기가 쉬이 빠지지는 않겠지만. 자세히 보니 발간 부분은 다 멍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걸릴까. 무심코 멍 자국을 누르니 카라마츠가 으, 하고 가볍게 숨을 삼켰다. 피부 아래로 근육들이 자잘하게 떨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살갗을 헤치고 직접 손을 넣어 하나하나 헤집어보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움직임이었다.


 “약 줘.”


 연고 통이 어깨 위로 쑥 올라왔다. 연고를 듬뿍 떠올린 손끝에 피부가 들러붙었다. 카라마츠가 다시 한 번 설핏 어깨를 떨었다. 제법 쓰라린 모양이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카라마츠의 등은 항상 엉망이었다. 공방을 찾는 현상금 사냥꾼들은 대개 몸에 한 개 이상의 큰 상처와 수십 개의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카라마츠라고 다를 리는 없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상처에 반창고까지 다 붙이고 난 다음에야 카라마츠가 허리를 폈다. 기지개를 펴는 온 몸의 선이 흠 잡을 곳 없이 깨끗하다. 종이 위에 셀 수 없이 선을 그어 온 이치마츠도 저 선은 따를 수 없었다. 수도에서는 사람의 몸을 사람의 손으로 빚어내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쳐도 저렇게 완벽한 선을 사람이 그릴 수 있어?


 “언제쯤 갈 수 있을 것 같아?”

 “장비 마련되면. 이삼일 정도 걸릴 거야.”

 “조금이라도 더 단축할 수는 없을까? 오소마츠가 돌아다니는 게 신경쓰이는군.”

 “장비 조정이 필요해. 갑자기 발굴 건이 생길 줄은 몰랐다고. 그리고 오소마츠는 도망갔을지도 몰라. 너에게 잡힐 뻔 했으니.”


 저번에 만들어 뒀던 장비가 있었는데, 아마 창고 어딘가에 천으로 잘 씌워서 밀어 넣었더랬지. 쓸 만하게 조정하려면 지금부터 바빠질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일거리 하나 들어온 게 막 마무리 된 참이니까 발굴하러 갈 시간은 있겠지. 머릿속으로 지금부터 할 일과 일정을 정리해 나가며 이치마츠는 찬장에서 약을 꺼냈다. 


 “진통제 먹고 자. 나 이제부터 바쁠 거니까 시끄럽게 나불대지 말고. 정비 다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어.”


 컵을 받아 든 카라마츠가 단숨에 액체를 삼켰다. 이 약국의 진통제는 꽤 성능이 좋다. 진통 효과도 부작용으로 따라오는 수면 효과도. 간이침대 위에 몸을 뉘인 카라마츠가 눈을 감았다.


 “고맙다. 이치마츠가 있어서 언제나 안심이야.”

 “멋대로 굴러들어오는 주제에 말이 많아. 큰 건수라도 안 가져왔으면 당장 쫓아냈어.”


 카라마츠가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권리도 없다. 지금 공방의 절반은 카라마츠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 견습 딱지를 떼고 독립한 기술자에게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없었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창고의 임대료조차도 힘에 부쳤다. 이대로 굶어죽나 싶을 때 비공정 운송회사의 견습 파일럿을 하고 있던 카라마츠가 찾아왔다. 신기하게도 그 날 뭘 팔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싼 것이었겠지, 견습 파일럿 주머니 사정이야 빤하니까.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카라마츠는 살 게 없어도 멋대로 공방에 쳐들어왔다. 나가라고 엉덩이를 걷어차도 그 다음날이면 싹 잊어버린 듯 나타났다. 나타나서 하는 말이라고는 대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듣기 힘든 내용의 노래 따위였지만 이치마츠는 그 쓸데없는 수다 속에서 어찌어찌 쓸 만한 정보를 찾아 팔릴 만한 도구를 만들었다. 카라마츠가 손님을 소개해 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끔은 팁을 받았다며 고양이 간식이나 인간 간식 따위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둘은 꼭 밤을 새워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대부분 카라마츠가 말했다) 새벽에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었다.

 카라마츠가 견습 딱지를 떼자마자 운송회사를 뛰쳐나가 현상금 사냥꾼으로 전직한 뒤로는 삶이 조금씩, 하지만 맹렬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씩 얼굴을 내밀던 카라마츠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보기도 힘들었다. 아주 멀리까지 나간다고 했다. 그 때쯤에는 이치마츠를 찾는 손님들도 꽤 많아져 바쁜 시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카라마츠가 새로운 비공정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을 때엔 열 일 제쳐놓고 매달렸다. 완성까지 이어진 격렬한 토론과 주먹다짐 끝에, 결국 카라마츠의 바람대로 날개달린 말 모양의 비공정이 태어났다. 정말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게 완성된 날 둘은 소소하게 자축연을 벌였다. 마시지 못하는 술을 몇 병인가 비우면서 끝없이 대화했다.

 그래, 그 날 밤이었구나. 

 카라마츠는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아니 널브러져서, 술 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져 있었고 이치마츠는 반쯤 흐려진 머리로 카라마츠를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그러니까 꼭 지금처럼. 

 카라마츠의 사지가 간이침대 여기저기 멋대로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겨우 진통제 마시고 죽었나 싶었지만 가슴이 규칙적으로 얕게 오르내리는 걸 보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야 진통제를 먹었으니 죽진 않고 자겠지. 아깝군,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렇게나 말이 튀어나왔다. 평소의 생기를 모두 잠 속에 몰아놓은 카라마츠는 이미 질릴 정도로 봐 왔지만 볼 때 마다 어색했다. 의식할 때마다 심장이 이상하다. 그 날 별로 밝지도 않던 달빛 아래 잠든 카라마츠를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부터.


 “자냐?”


 대답은 없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애초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으려 던진 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어깨를 지긋이 붙들었다. 이 상황에서 카라마츠가 깨어나면 둘러댈 말을 수십 개 정도 생각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거칠다. 누구의 것이 거친 건지 몰랐지만 어쨌든 신경에 거슬렸다. 혀를 내밀어 상대의 입술을 핥아 보았다. 카라마츠가 으응, 하고 깊은 숨소리를 내며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 뒤로 물러섰다. 몇 걸음인가 물러설 때 까지도 카라마츠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진통제 먹고 곯아떨어졌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깨어날까,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들은 대개 정신적으로 빠듯한 삶을 살고 있으니 예민할 법도 한데. 생각은 행동을 이기지 못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매끄러워진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카라마츠가 다시 한 번 느리게 소리를 흘렸다. 살짝 생겨난 틈을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뜨겁다. 머리도 뜨거워졌다.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혀에 닿으니 뒷골이 당길 정도로 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자꾸 움직이는 상대의 고개가 불편했다. 손으로 양 뺨을 붙들었다. 무력하게 흔들리는 혀를 붙들어 핥고 맛보았다. 살덩어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전신의 신경이 울렸다. 머릿속에는 감각과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상대의 이름만이 남았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숨이 차오른다. 생각이 무거워진다.

 이치마츠는 몸을 떼어내어 축축한 입술을 닦았다.

 참기 어려운 죄악감이 심장을 두들겼다. 카라마츠와 마주하면 언제나 감정이 솟구치고, 다시 격하게 추락하게 된 지도 꽤 되었다. 상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키스를 나눈 지도 수십 번이다. 알아. 비겁하고 한심하고 성추행범이고. 그런데 네가 나를 거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게 하는 쪽이 나은 것 같아. 

 아직 밤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하기에는 늦지 않은 시간이다. 이치마츠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감정을 분해할 수 없으니 기계라도 분해하러 가는 편이 나았다. 



Posted by *루미*
2017. 3. 20. 00:54

* 모종의 마감으로...는 사실 다들 아실 것 같은 그 마감입니다만 여튼 자신을 다잡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 오늘 건 좀 지루한 파트일지도요 




 고철덩어리 쪽에 한없이 가까워진 비공정을 창고에 밀어 넣고 돌아오니 카라마츠가 간이침대 위에 앉아 홀로 낑낑대고 있었다. 자신 쪽을 향한 등이 전구 아래에서 허옇게 빛났다. 약은 또 언제 멋대로 꺼내 놓은 건지. 그야 약상자를 사다 놓은 건 카라마츠이니 별 수 없지만. 언제 사다 뒀더라, 아마 일 년쯤 전이었던가. 공방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었는데 집에 약이 없었고 있는 거라고는 뒹굴고 있던 카라마츠 뿐이었지. 약을 찾아 허둥대던 카라마츠는 그런 거 없어, 라는 이치마츠의 말을 듣자마자 당장 이치마츠를 업어들고 병원으로 달렸다. 다행히 흉터는 심하지 않아 금방 사라졌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치마츠, 자신을 소중히 해라, 라고 잘라 말하던 목소리와 온통 굳은 채 눈빛만 어지러이 흔들리던 그 얼굴을 잊으려 해야 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범죄자를 잡다 칼빵 맞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는 녀석이 겨우 남의 화상 따위에 기급을 해 벌벌 떨다니 웃기지 않아?

 

“미안하지만, 도와주지 않겠는가. 등에는 팔이 닿지 않는군.”


 그리 밝지 않은 불빛 아래에서도 등에 새겨진 오래 된 흉터들이 생생했다. 그 중에서 유독 발갛게 부풀어 오른 새 상처가 눈에 띄었다. 제법 강한 찰과상 정도이니 이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붓기가 쉬이 빠지지는 않겠지만. 자세히 보니 발간 부분은 다 멍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걸릴까. 무심코 멍 자국을 누르니 카라마츠가 으, 하고 가볍게 숨을 삼켰다. 피부 아래로 근육들이 자잘하게 떨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살갗을 헤치고 직접 손을 넣어 하나하나 헤집어보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움직임이었다.


 “약 줘.”


 연고 통이 어깨 위로 쑥 올라왔다. 연고를 듬뿍 떠올린 손끝에 피부가 들러붙었다. 카라마츠가 다시 한 번 설핏 어깨를 떨었다. 제법 쓰라린 모양이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카라마츠의 등은 항상 엉망이었다. 공방을 찾는 현상금 사냥꾼들은 대개 몸에 한 개 이상의 큰 상처와 수십 개의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카라마츠라고 다를 리는 없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상처에 반창고까지 다 붙이고 난 다음에야 카라마츠가 허리를 폈다. 기지개를 펴는 온 몸의 선이 흠 잡을 곳 없이 깨끗하다. 종이 위에 셀 수 없이 선을 그어 온 이치마츠도 저 선은 따를 수 없었다. 수도에서는 사람의 몸을 사람의 손으로 빚어내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쳐도 저렇게 완벽한 선을 사람이 그릴 수 있어?


 “언제쯤 갈 수 있을 것 같아?”

 “장비 마련되면. 이삼일 정도 걸릴 거야.”

 “조금이라도 더 단축할 수는 없을까? 오소마츠가 돌아다니는 게 신경쓰이는군.”

 “장비 조정이 필요해. 갑자기 발굴 건이 생길 줄은 몰랐다고. 그리고 오소마츠는 도망갔을지도 몰라. 너에게 잡힐 뻔 했으니.”


 저번에 만들어 뒀던 장비가 있었는데, 아마 창고 어딘가에 천으로 잘 씌워서 밀어 넣었더랬지. 쓸 만하게 조정하려면 지금부터 바빠질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일거리 하나 들어온 게 막 마무리 된 참이니까 발굴하러 갈 시간은 있겠지. 머릿속으로 지금부터 할 일과 일정을 정리해 나가며 이치마츠는 찬장에서 약을 꺼냈다. 


 “진통제 먹고 자. 나 이제부터 바쁠 거니까 시끄럽게 나불대지 말고. 정비 다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어.”


 컵을 받아 든 카라마츠가 단숨에 액체를 삼켰다. 이 약국의 진통제는 꽤 성능이 좋다. 진통 효과도 부작용으로 따라오는 수면 효과도. 간이침대 위에 몸을 뉘인 카라마츠가 눈을 감았다.


 “고맙다. 이치마츠가 있어서 언제나 안심이야.”

 “멋대로 굴러들어오는 주제에 말이 많아. 큰 건수라도 안 가져왔으면 당장 쫓아냈어.”


 카라마츠가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권리도 없다. 지금 공방의 절반은 카라마츠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막 견습 딱지를 떼고 독립한 기술자에게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은 없었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창고의 임대료조차도 힘에 부쳤다. 이대로 굶어죽나 싶을 때 비공정 운송회사의 견습 파일럿을 하고 있던 카라마츠가 찾아왔다. 신기하게도 그 날 뭘 팔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싼 것이었겠지, 견습 파일럿 주머니 사정이야 빤하니까.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카라마츠는 살 게 없어도 멋대로 공방에 쳐들어왔다. 나가라고 엉덩이를 걷어차도 그 다음날이면 싹 잊어버린 듯 나타났다. 나타나서 하는 말이라고는 대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듣기 힘든 내용의 노래 따위였지만 이치마츠는 그 쓸데없는 수다 속에서 어찌어찌 쓸 만한 정보를 찾아 팔릴 만한 도구를 만들었다. 카라마츠가 손님을 소개해 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끔은 팁을 받았다며 고양이 간식이나 인간 간식 따위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둘은 꼭 밤을 새워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대부분 카라마츠가 말했다) 새벽에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었다.

 카라마츠가 견습 딱지를 떼자마자 운송회사를 뛰쳐나가 현상금 사냥꾼으로 전직한 뒤로는 삶이 조금씩, 하지만 맹렬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씩 얼굴을 내밀던 카라마츠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보기도 힘들었다. 아주 멀리까지 나간다고 했다. 그 때쯤에는 이치마츠를 찾는 손님들도 꽤 많아져 바쁜 시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카라마츠가 새로운 비공정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을 때엔 열 일 제쳐놓고 매달렸다. 완성까지 이어진 격렬한 토론과 주먹다짐 끝에, 결국 카라마츠의 바람대로 날개달린 말 모양의 비공정이 태어났다. 정말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게 완성된 날 둘은 소소하게 자축연을 벌였다. 마시지 못하는 술을 몇 병인가 비우면서 끝없이 대화했다.

 그래, 그 날 밤이었구나. 

 카라마츠는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아니 널브러져서, 술 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져 있었고 이치마츠는 반쯤 흐려진 머리로 카라마츠를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그러니까 꼭 지금처럼. 

 카라마츠의 사지가 간이침대 여기저기 멋대로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겨우 진통제 마시고 죽었나 싶었지만 가슴이 규칙적으로 얕게 오르내리는 걸 보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야 진통제를 먹었으니 죽진 않고 자겠지. 아깝군,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렇게나 말이 튀어나왔다. 평소의 생기를 모두 잠 속에 몰아놓은 카라마츠는 이미 질릴 정도로 봐 왔지만 볼 때 마다 어색했다. 의식할 때마다 심장이 이상하다. 그 날 별로 밝지도 않던 달빛 아래 잠든 카라마츠를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부터.


 “자냐?”


 대답은 없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애초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으려 던진 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어깨를 지긋이 붙들었다. 이 상황에서 카라마츠가 깨어나면 둘러댈 말을 수십 개 정도 생각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거칠다. 누구의 것이 거친 건지 몰랐지만 어쨌든 신경에 거슬렸다. 혀를 내밀어 상대의 입술을 핥아 보았다. 카라마츠가 으응, 하고 깊은 숨소리를 내며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변명거리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 뒤로 물러섰다. 몇 걸음인가 물러설 때 까지도 카라마츠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진통제 먹고 곯아떨어졌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깨어날까,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들은 대개 정신적으로 빠듯한 삶을 살고 있으니 예민할 법도 한데. 생각은 행동을 이기지 못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매끄러워진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카라마츠가 다시 한 번 느리게 소리를 흘렸다. 살짝 생겨난 틈을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뜨겁다. 머리도 뜨거워졌다.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혀에 닿으니 뒷골이 당길 정도로 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자꾸 움직이는 상대의 고개가 불편했다. 손으로 양 뺨을 붙들었다. 무력하게 흔들리는 혀를 붙들어 핥고 맛보았다. 살덩어리들이 미끄러질 때마다 전신의 신경이 울렸다. 머릿속에는 감각과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상대의 이름만이 남았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숨이 차오른다. 생각이 무거워진다.

 이치마츠는 몸을 떼어내어 축축한 입술을 닦았다.

 참기 어려운 죄악감이 심장을 두들겼다. 카라마츠와 마주하면 언제나 감정이 솟구치고, 다시 격하게 추락하게 된 지도 꽤 되었다. 상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키스를 나눈 지도 수십 번이다. 알아. 비겁하고 한심하고 성추행범이고. 그런데 네가 나를 거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게 하는 쪽이 나은 것 같아. 

 아직 밤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하기에는 늦지 않은 시간이다. 이치마츠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감정을 분해할 수 없으니 기계라도 분해하러 가는 편이 나았다. 

Posted by *루미*
2017. 3. 13. 00:28

* 모종의 마감으로...는 사실 다들 아실 것 같은 그 마감입니다만 여튼 자신을 다잡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죽었냐?”


 발끝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카라마츠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손을 쥐었다 손가락을 멋대로 펴고 접으며 알 수 없는 수신호를 보내는 모습에 이치마츠는 바로 다음 행동을 확실히 정했다. 그리고 손에 닿는 것들 중 가장 무거운 것을 집어 들었다. 묵직해진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일격에 확실히 성불시킬 만한 곳을 눈으로 가늠하고 있으려니 카라마츠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있는 힘껏 여유가 있어 보이려 노력하던 카라마츠는 자신의 머리를 노리는 둔기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치뜨며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노노노노노노농 이치마츠, 이치마츠으? 나는 분명히 생명의 끈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신호를 보냈을 텐데?”

 “기다려 봐. 더 확실하게 죽여 줄 테니.”


 이치마츠는 둔기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확실히 급소를 노리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공중에서 팔이 멈추었다. 허둥지둥 둔기를 양 팔로 받아낸 카라마츠가 그것을 얌전히 옆으로 밀어내었다. 표정은 그저 황망해 보였지만 힘만은 황야에서 날뛸 때 못지않은 모양이었다. 이치마츠는 못 이기는 척 둔기를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장비가 좀 필요할 것 같다. 만들어주지 않겠나?”

 “이번에는 어떤 놈이냐, 오소마츠는 아닌 것 같고. 이야미?”

 “천연 노을석을 발견했다.”


 이치마츠는 무심코 카라마츠의 멱살을 붙들었다. 카라마츠가 이제는 거의 울 듯 한 표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노을석, 심지어 천연 노을석. 본명은 따로 있지만 맑은 여름날의 노을을 담아 놓은 모양새라 모두 노을석으로 부르는 광물은,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높았지만 영구 기관의 연료로 더욱 유명했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물속에서는 끊임없이 불타오르며 증기를 만들어내는 이 돌 근처에는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제국조차도 이 보석을 얻기 위한 셀 수 없는 전쟁 속에서 튀어나온 부산물이었다. 다행히 이후 제국 최고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누군가가 인공 노을석의 합성법을 알아낸 덕분에 오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인공 노을석은 아쉽게도 수명이 정해져 있었다. 제국 유수의 과학자들이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지만 1년에서 10년으로 늘린 정도였다. 덕분에 물만 있으면 영구적으로 증기를 만들어내는 천연 노을석에 대한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런 노을석을 찾아냈단 말이지, 천연으로. 성능이 덜한 인공이 존재할수록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엄지손가락만한 것 한 덩이만 있으면 이 공방 건물과 속의 기구들을 완전히 새 것으로 바꾸어버리고…아니지 일 따위 안 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지. 주먹 정도 되는 것이라면 삼 대는 먹고 살 수 있을 테고. 순식간에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한 이치마츠는 아직도 손에 붙들려 있는 카라마츠를 잡아 흔들었다.


 “언제어디서몇시몇분얼마나? 크기는?!”

 “최근 오소마츠가 이 근방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깊고 깊은 산 속,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자연의 비경 속 깊은 동굴을 나는 찾아내고야 말았지. 동굴 속에 혹시나 숨어 있지 않을까 싶어 어둡고 습한 동굴 속을 헤치고 들어간 그 끝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노을석이! 그것은 마치 그날의 첫 번째로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찬란함이었다. 강렬한 반짝임에 내 의식은 한동안 그 포로가 되어 있었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내 팔뚝만 했다. 하지만 돌 속에 파묻혀 있어서 실제 크기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에는 내 손에 든 것이 너무 없더군. 서운하지만 일단 그 자리에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온전한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채굴 장비가 필요하겠군, 한 번도 보지 못한 보석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이치마츠는 습관처럼 둔기를 바닥에 툭툭 찧었다. 묵직한 소리에 카라마츠가 어깨를 슬쩍 떨었다.


 “그래서, 비공정은 왜 박살이 난 거야?”

 “그 이야기도 이제 막 하려던 참이다! 아름다운 보석의 찬란한 모습을 기억하며 나의 페가서스-와 함께 푸른 하늘을 내달리고 있었지…. 바람은 쾌적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으며 아아아아아알았다 그것 좀 내려놓으면 안 될까? 결론만 말하지. 가다가 마주쳤다. 오소마츠와.”


 제국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무법자는 최초로 지명수배 된 이후로-고위 귀족의 고급 자동차를 껍데기만 들어다가 고물 차에 씌워 버렸다고 한다-남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죄들을 저질러 가며 꾸준히 유명세를 쌓았다. 그 때만 해도 제국 측에서는 처리에 골치가 아픈 그저 그런 망나니 경범죄자 정도로만 여겼다. 사실 제국 대학 담벼락에 당당하게 자기 사인을 한 거대한 남성 성기를 그려놓거나(솔직히 대단히 못 그렸다), 경찰청장 집에 숨어들어가 모든 방문 손잡이에 접착제를 발라 놓는 짓은(그 일이 꼬리를 물어 경찰청장은 불륜을 들키고 이혼 당했다) 꽤 악질적인 장난이기는 해도 중범죄로는 취급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몇 번의 경범죄 혹은 장난질 끝에 이 난봉꾼은 대단한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황제의 생일 파티에 올라갈 케이크를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싸구려 케이크와 바꿔치기 한 것이다. 황궁의 보안이 뚫렸다는 소식에 온 나라는 발칵 뒤집혔고, 동시에 그 삼엄한 보안을 뚫고 했다는 일이 황제 암살이 아니라 고작 케이크 바꿔치기라서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오소마츠의 목에는 당시 시점으로 제국 최고의 현상금이 매겨졌다. 그리고 그 현상금은 오소마츠가 뭔 일을 벌일 때마다 점점 신기록을 경신해, 지금은 오소마츠만 잡아도 죽을 때 까지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카라마츠 같은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포획 0순위이다.


 “그 녀석, 역시 만만치 않더군.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몸의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우리의 사이가 멀고도 멀었지만 결국은 남자답게 주먹을 맞대어 진심을 보였지. 그 와중에 망가진 거다. 막판에 총을 집어던져 엔진을 맞추는 통에 결국 비상 착륙을 할 수 밖에 없었지. 잡을 수 있었는데 말이야. 녀석의 비공정도 꽤 많이 망가졌거든.”


 온 사방이 적인데도 오소마츠가 잘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말로 전투에 익숙하고 운까지 좋기 때문이다. 카라마츠 뿐만 아니라도 현상금 사냥꾼은 많았고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도 거금에 관심 있는 사람은 더 많았다. 장난질의 수십 배 정도 되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오소마츠는 지치지 않고 모든 포획 시도에서 벗어났고 그 과정에서 피해액은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현상금은 또 올라가고 그를 노리는 사람은 더욱 많아지고. 악순환이다.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얌전히 잡히는 게 나을 텐데. 물론 내 손에. 


 “둘 중 하나만 손에 넣어도 인생 펴는 거군.”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저 빛나는 노을석처럼 우리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 이치마츠여!”


 어깨를 감싸오는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카라마츠가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였지만 곧 활력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치마츠의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치마츠도 필요해.”


 가슴 안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 멍청한 자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굉장한 말을 꺼내고는 했다.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다잡을 수 없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속으로 정확히 다섯을 센 후, 이치마츠는 퉁퉁 튀기 시작한 심장을 억누르며 되도록 평온하게 대꾸했다.


 “해 본 적 없어, 동굴 속 채굴은.”

 “하지만 야외 발굴은 해 보지 않았나. 그 때 식수원 바로 옆에 붙어 있던 고대 오파츠를 멋지게 발굴해낸 거, 기억하고 있다. 이치마츠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한 번도 안 해 본 일인데 다 할 수 있을 것 같잖아. 망할. 하지만 말을 돌릴 힘은 없었다. 카라마츠가 고물덩이가 된 페가서스인지 뭔지를 끌고 이 공방에 굴러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얼마로 나눌 거야?”

 “5:5. 장비 대여료와 비공정 수리비, 그리고 완성 될 때까지의 숙식 포함. 괜찮지 않은가?”


 사실 대단히 후한 편이었다. 제국법은 발견자 쪽에 더 큰 권리를 부여하도록 지정하고 있었으므로, 카라마츠가 9:1을 불러도 이치마츠는 거절할 길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부르면 당장 공방에서 내쫒았겠지만.


 “좋아.”


 이치마츠의 눈치를 멀뚱히 살피던 카라마츠가 방긋 웃었다. 그 바보같이 말간 미소가 굉장히 심장에 좋지 않았다. 거의 헐벗다시피 한 옷 꼬락서니로 내려가면 더욱 기가 막혔다. 찢어지고 헐어서 먼지투성이라니, 도대체 뭔 짓을 하면서 황야를 뒹굴고 다닌 건가. 도대체 둘이서 무슨 몸의 대화 같은 걸 나눴다는 거야. 그야 뭐 주먹다짐 좀 하고 총이나 좀 쏘고 그랬겠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해 가며. 그러면 오소마츠 그 자식은 카라마츠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버린 꼴을 봤다는 건가. 아니 직접 만든 거나 다름이 없겠네. 생각해보니 꽤 울컥했다. 제아무리 제국 최고의 현상금을 목에 건 수배범과 제국 최고의 보석이 걸려 있대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했다.


 “일단 지금 당장 씻어. 거지꼴이잖아.”

 “샤워장부터 빌려주는 건가? 고맙다. 역시 이치마츠는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을 바로 알려주는군.”


 아, 진짜! 이치마츠는 뒤통수를 박박 긁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물론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말로 정리하는 사이, 카라마츠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샤워장으로 걸어갔다. 따라갈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샤워하는 소리까지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추적을 시도하는 대신, 이치마츠는 옆에 놓인 둔기만 열없이 걷어찼다. 솔직히 좀 아팠다. 정신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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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마츠 언급이 많지만 여튼 이치카라 맞습니다. 오소마츠는 주요등장인물이라 묘사가 많은 것 뿐입니당:3

스팀펑크인데 초반부터 안 스팀펑크하네요...엉엉....

Posted by *루미*
2016. 12. 5. 00:15

* 어디에선가 받은 리퀘입니다. 사실 대단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파카카라입니다. 악마 오소->신부 카라<-사신 이치 삼각관계입니다. 제가 에로력이 짧아 에로는 없습니다.






 본당 한가운데에서 피비린내가 퍼져 나왔지만 아무도 몰랐다. 평일 저녁, 아무 행사도 없는 예배당에 일부러 찾아들 사람은 없었다. 숲 근처 으슥한 곳에 있어 괴물이 자주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이 성당에는 여행객도, 심지어 강도조차 밤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예배는 숲에 볕이 가득할 때에야 시작했고 끝나면 다들 바삐 발길을 돌렸다. 암묵적인 두려움과 무시 속에서 젊은 신부만 홀로 성당을 지켰다.

 떠날 수 없겠지. 신부님이니까.

 악마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주저앉은 신부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바닥을 내달리는 피가 아주 잘 보였다. 뭐 악마니까 밤눈 밝은 것 정도야 이상한 건 아니지, 그리고 저 피는 아주 맛있어 보이고. 바닥에 흐르는 피 한 방울조차 아까웠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어서인지 입 안으로 침이 돌았다. 먹음직한 음식을 보고 동하는 인간처럼. 


 “신부님 힘들어?”

 대답 대신 그르렁대는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온통 검은 수단 위로 유일하게 다른 색인 십자가가 희미하게 오르내렸다. 음, 잘 안 들리네. 악마는 신부의 입가 쪽으로 귀를 바싹 가져다대었다.


 “신부님, 지금이라도 어때? 나한테 말하면 고통 없게 해 줄 텐데.”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언어가 되지는 않았다. 아 뭐 말 할 정신머리나 있으려나. 엄청난 놈을 셋이나 잡다가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둘은 신부의 손에 온 몸이 터져나가 형체조차 사라졌고 신부의 배에 구멍을 뚫은 놈은 악마가 먹어버렸다. 솔직히 맛은 없었다. 하급 악마 따위 보다 다 죽어가는 신부의 영혼이 훨씬 맛있어 보인다. 신부만 허락한다면, 신의 손길이 닿은 저 망할 옷과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악마에게 내어준다면 발톱에서 머리카락 올올이 맛있게 먹어 줄 수 있을 텐데. 먹히는 사람조차 만족스러울 정도로.

 악마는 한껏 혀를 내밀어 신부의 입가를 핥았다. 진득한 쇠 맛이 짜릿했다. 평생을 신만 생각하며 살고 싸워 왔던 영혼은 어떤 맛일까. 자신의 말 몇 마디에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인간들과는 분명 다른 맛이겠지, 아니면 의외로 맛이 없을지도. 그야 뭐 맛을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신부의 터져버린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 좀 심했나. 다 죽어가는 사람인데.


 “우웅, 오해하지 말아 줘 신부님. 시체 애호 취미는 없어. 아참 지금은 시체 아니지, 뭐 이제 곧 시체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시체가 되기 전에 나랑 계약하자고! 안 아프게 해 줄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힘겹게 고개를 젓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써 버린 건지 신부가 눈을 감았다. 거 참 가만있으면 죽는다는데도 엄청 딱딱하게 구네. 항상 그랬지만.

 눈앞으로 날카로운 것이 스쳐지나갔다. 악마는 히이익, 하고 실제보다 훨씬 더 놀란 목소리를 꾸며 내며 성당 천장 쪽으로 한껏 치솟아 올랐다. 날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아래로 사신의 낫이 공기를 다시 한 번 찢어내었다. 신부보다 더욱 새카만 망토 아래로 흐린 듯 벌겋게 빛나는 눈이 악마를 노려보았다.


 “너, 가라.”

 “엥, 신부님은 가라구 안했는뎅?”

 “배에 구멍이 뚫린 마당에 가라 말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머리 위로 흉흉한 날붙이가 오가고 악마가 날개를 한껏 편 채로 날았지만 신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래 끓는 듯 한 숨소리만이 겨우 그의 생명을 붙들고 있었다. 잠깐 허공을 맴돌던 악마는 사신이 낫을 내려놓고 신부의 옆에 쭈그려 앉은 뒤에야 겨우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사신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신부의 입가를 훑었다. 악마의 침을 닦아내던 손이 하얗게 질려가는 입술에 닿았다. 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들이쉬는 숨소리가 살짝 커졌다. 입 안을 두어 번 휘저으니 그제야 몸이 희미하게 움찔댔다.


 “죽지는 않아, 가만있어.”


 얼굴 반절 이상을 덮은 검은 망토 아래에서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우물대던 입술이 날카로운 송곳니 아래에서 찢겨나갔다. 창백한 입술에 피가 방울져 솟아올랐다. 죽음의 신가 죽음에 가까이한 인간의 입술이 가까워지다, 곧 마주 닿았다. 사신의 혀가 길게 움직여, 아주 좁은 틈으로 흘러내리던 피를 다시 상대의 입 안으로 꾹 밀어 넣었다. 사신의 등 뒤에서 기웃대던 악마가 날개를 퍼득 뻗으며 소리 질렀다.


 “잠깐, 사신님, 너무하잖아! 이건 완전 상도덕에서 어긋나는 거 아냐?!”


 굳어가던 핏덩이들이 다시 말갛게 살아났다. 피의 강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몇 번인가 들썩이던 핏덩어리들이 자신이 흘러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가 뱀처럼 뭉쳐 신부에게로 기어왔다. 찢긴 옷에 묻어나던 피까지 한데 모여 벌어진 상처를 덮쳤다. 멍하니 바닥만을 바라보던 신부가 이를 악물었다. 억누르는 듯 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흐윽, 큭, 으으윽, 신부가 한 번씩 신음할 때 마다 핏물이 상처를 후벼 파 스스로 피부 속으로 돌아갔다. 핏줄이 파랗게 달아올라 자신의 존재를 피부 아래 아로새겼다. 신부의 손이 바닥을 긁고 쥐어뜯었다. 크, 아학, 으, 으아아, 아윽, 다리가 경련하듯 바닥을 걷어찼다. 참지 못한 목소리들 속에서 피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옷에 들러붙어 있던 끈적끈적한 방울마저도 천을 두르르 굴러 핏덩어리 안으로 스며드는 모습에 악마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붉은 물기가 모두 사라진 피부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상처를 온전한 살덩어리로 뒤덮었다. 몸에 새겨진 흠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악마가 목 깊은 곳에서 으르렁대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순식간에 몸의 두어 배로 늘어난 날개가 바닥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신은 그제야 느릿하게 일어섰다. 바닥에 뒹굴던 낫이 소리 없이 그 손으로 들러붙었다. 악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기어올라 날개에 들러붙었다. 악마가 한 걸음 내딛자 검은 것들을 잡아먹으며 꿈틀대던 날개가 한껏 펼쳐졌다. 짐승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의지를 가진 검은 덩어리들이 사신을 덮쳤다. 노도처럼 덮쳐오는 어두운 것들 앞에서 사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몸보다 더 큰 낫이 날개 모양의 그림자를 찢어발겼다. 악마가 이를 갈며 다시 한 걸음 사신에게 가까워졌다. 날개 덩어리가 사신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낫에 덕지덕지 들러붙는 그림자 덩어리에 움직임이 둔해졌다. 사신이 무어라 욕설을 내뱉으며 망토를 끌어내렸다. 낫이 사신의 눈동자와 함께 보라색으로 빛났다. 순식간에 사신의 앞에 선 악마가 그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날카롭게 튀어나온 손톱이 창백한 살갗을 노렸다. 사신은 물러서는 대신 그림자를 떨구어낸 낫을 그대로 악마의 목을 향해 밀어붙였다. 찰나가 영원처럼 지나가며 인간이 아닌 자들의 움직임을 붙들었다.

 터질 듯 한 공기 속으로 낮은 목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시끄…럽다.”


 악마의 날개가 움찔 굳었다. 사신이 낫을 멈추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버르적대던 신부의 고개가 깊고 무거운 숨과 함께 미끄러졌다.


 “여기서…더, 소리, 커지면, 사람들이 온다. 이쯤, 해.”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던 악마가 날개를 접었다. 어둠은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악마의 등에는 앙증맞은 날개 한 쌍만이 남았다. 사신은 낫을 아래로 향했다.

 신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굳어있던 검은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상처 하나 없는 가슴이 가쁘게 헐떡였다. 사신이 혀를 끌끌 찼다. 망토 아래에서 쑥 튀어나온 발이 신부의 어깨를 꾹 밟았다. 신부는 주먹을 꽉 움켜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겨우면 확실히 한 방에 죽어버려. 내가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애매하게 다 죽어가지 말고.”

 “지겹지는 않다, 오히려 이 미력하고…죄 많은 몸을 고쳐 주니, 감사할, 뿐이지. 하지만 아직…인간인 내게는…좀 버겁군.”

 “이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악마가 깨끗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사신이 낫을 뿌듯이 움켜쥐었다.


 “몸은 인간이겠지만 삶이 인간이 아니쟈낭. 매일 상대도 안 되는 괴물이랑 싸우고, 매일 다 죽어가고, 매일 사신님이 와서 되살려줘서 겨우 목숨 연명하는데 무슨 인간? 차라리 게임 주인공이 더 어울리겠당. 엑, 아니지. 주인공 아니라 그냥 좀비네! 몬스터네!”

 “…그런가.”


 인류를 대신해 죄를 짋어지고 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길티 가이가 짊어져야 할 숙명에 어울리지 않는가, 흘러가던 목소리가 말끝에서 웃음이 되었다. 사신이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악마가 한숨을 폭 쉬었다.


 “있지 신부님, 지금이라도 나랑 계약하는 게 어때? 신부님 영혼 주면 신부님 죽을 때 까지 내가 잘 해 줄게. 하급 악마 같은 건 그냥 들이마실 수 있다니깐?”

 “안 돼. 너는 못 건드려.”

 “그럼 사신님이 신부님에게 원하는 건 뭐야?”


 사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신부가 굵은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사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시선을 흘리던 사신이 짧고도 긴 침묵 끝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


 “…얌전히, 때 되면, 죽는 거.”

 “헤에, 그러면 그거네!”


 악마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사신의 거대한 낫이 허공에서 일어섰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꺼져버려.”

 “때가 되지 않으면 신부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죽는 거네!”

 “그만 해라.”

 “그런데도 사신님은 굳이 와서 살려주는 거고!”

 “하지 말라고!”


 자신 쪽을 향해 날아오는 낫을 춤추듯 피한 악마가 순식간에 신부의 옆에 섰다. 신부를 일으켜 앉히며 그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자 사신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파들파들 떨리던 낫이 악마와 신부의 눈앞에서 그대로 땅을 향했다.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였다. 되살아난 피가 아직 몸 구석구석까지 가 닿지 못한 건지, 악마가 멋대로 뺨을 부비는데도 움직임이 둔했다. 눈빛만이 단단하게 굳어 사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신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붙들린 듯.

 신부가 고개를 숙였다. 사신에게, 악마에게.


 “…고맙다.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한낱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군.”

 “엥, 나는 원하는 게 확실하다니깐! 신부님 영혼!”

 “됐다. 너 따위에게 뭘 받느니 차라리 사신 폐업하고 말지.”

 “하하, 모두 무리군. 어쩔 수 없지. 오늘도 죄가 쌓여만 가는가. 역시 고독한 영혼들의”

 “있지 신부님, 죽다 살아나는 거 싫으면 꼭 연락해? 나 또 올게!”


 악마가 노골적으로 소리를 내며 신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신부는 간지럽다, 고 중얼대긴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얼굴이 벌개진 사신에게 윙크를 하는 악마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솟아올랐다. 두어 번 날갯짓을 하자 예배당의 문이 벌컥 열렸고, 다음 순간 악마는 유유히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밤하늘 속으로 그 몸이 녹아 사라진 뒤에야 사신이 낫을 움켜쥔 손의 힘을 풀었다.


 “다음번에는 안 도와줘.”

 “그런가. 드디어 이 몸이 신에게 받은 목숨을 되돌려 드릴 때가 가까워 왔다는 거군.”

 “아, 진짜, 그런 뜻이 아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른 사신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짜증스러운 눈빛이 다른 감정과 섞여 격하게 흔들렸다. 신부는 여전히 창백한 낯빛으로 사신에게 웃어 주었다. 망토 속에서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열린 예배당 문 안으로 거친 바람이 내달으며 사신의 망토를 크게 건드렸다. 너풀대던 검은색의 망토가 어느 순간 바람에 녹아 사라졌다. 예배당 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엉망이 된 의자들과 부서진 집기, 바람 소리, 신부만 빼고.

 그제야 신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막아 두고 있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심장이 뛴다. 숨을 쉰다. 앞이 제대로 보인다. 아,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아남았구나. 매번 목숨이 위태할 때 마다 걸어왔던 희미한 희망은, 자신의 삶이 확실히 정리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예측은 이번에도 어긋나 버렸다.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자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살아가는 것을 빼고.



 고맙군. 내 삶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모두 가져가 버려서.



 때가 되기 전까지 무한정 되살아날 수밖에 없고, 고통을 덜기 위해 영혼을 버릴 수도 없이,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버텨 나가야 하는 삶을 들이밀어서.



 너희들이 나를 사이에 두고 무얼 해도 내가 괜찮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착각해서, 정말 고맙군.



 신부는 나무 의자를 붙들고 힘겹게 일어섰다. 눈앞이 빙글 돌았지만 의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버텼다. 하얗게 질렸던 시야가 겨우 돌아온 뒤에야 예배당 안의 참상이 보였다. 내일 아침 예배가 시작되기 전 조금이라도 치워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망가진 걸 보면 사람들이 놀랄 테니.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치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몸을 돌기 시작한 피에 손끝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앞으로도 수십 번 찢겨나갔다 붙을 몸과 영혼의 흔들림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며, 신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의자부터 힘을 주어 밀었다. 






Posted by *루미*
2016. 9. 11. 23:16

* 밴드 베이스 이치마츠x평사원 카라마츠 AU

* 카라른입니다 이 모양이지만 카라른으로 썼습니다(진지




감기 나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




 라이브하우스가 한 주간 휴업을 선언했다. 감기 때문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라 길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부쩍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번 감기는 평소보다 좀 더 독했다. 단골손님들을 넘어 뮤지션들에게까지 독감이 퍼져나가자 라이브하우스 측은 눈물을 머금고 한 주간 문을 닫기로 했다.

 좋겠네 상식적이네 올바른 조치네. 바닥에 퍼져 누운 이치마츠를 바라보며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라이브하우스가 멈추지 않았다 해도, 이치마츠와 키보드를 치는 친구가 동시에 독감에 걸린 이상 밴드는 당분간 쉴 수밖에 없었다. 카라마츠의 회사 직원들도 결근하거나 마스크를 한 채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사장은 ‘감기는 노오오오오오력으로 극복하자’고 훈시했다. 그 직후 아내가 감기에 걸리자 열 일 내팽개치고 집에 돌아가 버렸지만.


 “카라마츠 씨….”


 빨래를 개던 손이 멈췄다. 평소보다 훨씬 더 흐릿한 목소리가 팔을 잡아끌었다. 카라마츠는 빨래를 팽개치고 이치마츠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은 아직도 발갰고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엉엉 울어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좀 나아진 것 같기는 했다.

 독감 때문에 일 할 사람이 줄어들어 사흘간 평소보다 훨씬 길게 야근을 해야 했다. 겨우 맞은 주말 새벽은 이치마츠의 울음소리에 날아갔다. 카라마츠 씨, 너무 아파, 살려 줘, 주사는 싫어, 평소라면 애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고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울어대는 이치마츠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감기에 걸렸으면 병원에 가야지, 이런 허름한 집에 기어들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투덜대면서 카라마츠는 아이처럼 울며 졸라대는 청년을 달래고 어르다 동이 틀 때에야 겨우 함께 잠이 들었다. 늦은 아침에 죽과 약을 먹일 때 빼고 이치마츠는 이불에 푹 싸인 채 내내 낑낑대며 앓기만 했다.


 “일어났어?”

 “우으, 물….”


 고개 돌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머리맡에 있는 물도 모를 정도라면. 카라마츠는 말없이 이치마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짝이 축축하다. 흐트러진 숨이 허무하게 꺼진다. 가끔 노래를 부를 때 마다 팬들의 정신을 혼곤하게 만들던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까슬까슬하게 망가졌다. 카라마츠의 품 안에서 잠시 색색대며 숨을 고르던 이치마츠가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이 허공을 헛돌아, 카라마츠는 말없이 컵을 입에 대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떨어졌다. 바싹 마른 입술이 물을 벌컥벌컥 빨아들였다.


 “죽, 끓여 줘?”

 “야채죽…. 흰죽 말고….”

 “야채 없어. 아픈 녀석이 음식을 가리다니 다 나았군.”


 이치마츠가 열심히 눈을 깜박였다. 흐린 눈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고비는 넘긴 걸까. 새벽에 지쳐 잠들기 직전 이 녀석 계속 이런 식이면 주사고 뭐고 응급실에 밀어 넣어 버리겠다고 결정했었는데. 컵을 내려놓았다. 눕혀 줄까, 가볍게 속삭이자 이치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그 직후 카라마츠, 냄새, 좋, 따위의 단어가 토막토막 들려왔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생각해보고 나서야 카라마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이 녀석, 을러대긴 했지만 차마 건드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 같다. 조금 더 독한 감기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새벽에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치마츠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새벽녘에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걸 알고 있을까. 연상의 동성의 품 안에서 아이처럼 물을 받아먹는 모습을 알고 있을까. 매일 무대에서 나른하고 흉포하게 베이스를 퉁기는 이 젊은 뮤지션이, 주사를 몹시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밴드와 팬들의 사정은 모른다. 다만 이치마츠는 다음번에 또 감기에 걸리면, 아니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분명 사소한 핑계로 이 낡은 집을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그리고 카라마츠 역시 그의 온갖 핑계를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들여보내 주리라는 것도.


 “감기 나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

 “으응….”


 이치마츠가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카라마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쩌지, 붙들고 있는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두려웠다. 카라마츠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땀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난다.

 감기 나으면 집으로 돌아가. 하지만 다시 오는 건 막지 않을 테니까.

 보라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들이 이마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머리카락들을 조심스레 골라내었다.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이치마츠가 웃었다.

Posted by *루미*
2016. 8. 27.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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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5. 23:57

이치카라 AU/ 돈이치x히라카라(돈히라)


* 구두예약 샘플용으로 앞서 올린 1~3편을 모두 모아 놓았습니다. 1~3편을 읽으신 분들은 굳이 안 보셔도 됩니다.

* 퇴고 전이므로 샘플의 내용과 실제 동인지의 내용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에게 물렸다, 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카라마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개에게 물렸다. 그랬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주변은 부장이 누군가에게 고함치는 소리와 그 와중에 걸려온 클레임 전화로 전쟁통이었고 아무도 카라마츠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부장이 들었다면 부장의 고함을 듣는 사람은 바로 카라마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욕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함을 듣는 시간이 늦춰질 뿐이다. 팀장을 뺀 팀원은 10명, 근무시간은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공식 8시간 비공식 6시간. 하루 한 사람씩 한 시간 동안 붙들고 괴롭혀도 시간이 남는다. 그 중 한 사람은 열외지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울렁거려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움츠려 최대한도로 부장의 시선에서 숨기로 했다.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 날 휴일을 쓴다는 것 같았지만 꿈같은 이야기였다. 근로기준법은 회사의 구성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쓰도록 하지만, 휴가 신청 후 억지로 회사에 나오거나 일거리를 집에 안고 돌아가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이, 마츠노오!”


 생각의 끈이 덜컥 끊겼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예에, 하고 되도록 친근한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제발, 차라리 내일까지 완성해야만 할 일감을 몇 개쯤 안겨주는 편이 낫다. 머리는 아프고 속이 울렁이는 이 상황에서 부장의 욕지거리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제 저녁 미팅 내용, 점심시간 전까지 보고서로 내!”


 되도록 평온한 눈빛, 평온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았다. 왠지 생명이 연장된 느낌이다. 오전까지 완성하라고 한 보고서가 두 개인가 더 있었지만, 분명 부장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야동 사이트를 돌다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 뻔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미팅도 아니다. 저쪽 회사의 부장인가 하는 사람과 이쪽의 부장이 술집에서 의기투합해 코가 비뚤어지게 퍼마시고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어차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부장은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카라마츠는 잠시 부장이 이 회사의 내부 비밀을 모두 주절주절 불어 버렸다고-사장이 불륜중이지만 발기부전이라 젊은 애인을 만족시켜 주질 못한다던가-써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월급날까지는 아직 2주가 남아 있었고, 빚을 완전히 변제하려면 2년 이상 더 일해야 했다. 돈은 저쪽 회사에서 낸다고 해 비용 처리를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뭐 알아서들 하시겠지, 5만 엔 정도 나온 것 같은데.

 돈이나 보고서 따위는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날 밤 짧지만 강한 해프닝이 있었다. 사람을 하루 종일 마음 복잡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일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나가는 가엾은 직장인일 뿐이다. 한때는 화려하고 매일이 두근거리는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봐, 마츠노 씨.”


 옆자리 직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라마츠는 부장에게 보인 온화한 미소를 그대로 가져갔다. 대꾸는 굳이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멋대로 말을 꺼냈다.


 “아~저번에 그거 말야, 시장분석, 내가 오후에 외근을 나가야 해서 완성을 못 할 것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상대의 도와달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안 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다 쓰라는 뜻이다. 외근이라니 어디 번화가에 놀러나가 여자 구경이나 하거나 애인을 불러다 드라이브나 가겠다는 거겠지. 카라마츠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고마워, 마츠노 씨, 하고 다시 뭔가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이 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장은 불륜을 저지르고 들킬 때마다 아내에게 납작 엎드려 빌며 아내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주었다. 옆자리 동료-동료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는 사장 아내의 조카였고 사장의 자숙 기간을 틈타 이 회사에 무사히 안착했다. 카라마츠가 빚을 다 갚을 때쯤이면 남자는 회사의 중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카라마츠가 써 준 보고서를 자신의 것으로 내밀어서. 그 때가 되어 무참히 쫓겨나지 않으려면 웃는 낯으로 그가 떠넘기는 일을 받아 들여야 했다.

 이딴 회사, 정말로 불에나 타 버리라지. 그렇게 해서 내가 죽으면 얼마나 나올까. 장례식 비 정도는 나오려나. 그 정도로는 빚을 상환할 수 없겠지. 생각은 몽실몽실 커져갔다. 빚, 몇 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 그래도 제법 행복했던 학생 시절, 웃으며 했던 연극부 활동.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면이 잘 안 보이는 척 모니터 가까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신의 생각을 누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신체의 사소한 변화를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로 천천히 묻어가다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당신, 발성 좋은데.

 어제 만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카라마츠는 그 남자와 키스했다.

 첫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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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에 약한 체질이라 술은 되도록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몇 잔은 피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뻗는다. 응급실 신세를 졌던 적도 있다(물론 정시 출근했지만). 물론 부장은 술고래고, 거래처가 될 상대사의 부장이라는 사람도 만만찮은 술꾼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점원이 술을 몇 번이고 다시 나르고, 테이블 위가 먹다 흘린 안주로 더러워졌지만 그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뻗거나, 분노한 아내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화제는 어느 순간 카라마츠로 넘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이 안주거리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즐겁지 않았다. 이 녀석 아직까지 여자친구도 없답니다~ 그쪽에 예쁜 애 좀 있으면 좀 연결해 주세요, 아하하하 요즘 여자애들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죠! 걔들도 이거랑 이게 좀 되는 남자를 찾지! 첫 번째 ‘이거’는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으는 걸로 보아 돈, 두 번째 ‘이거’는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는 걸로 보아 뭔지 뻔하다. 삼십 년 가까이 동정으로 살아 온 카라마츠이지만,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여자들이 질겁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휴게실에서 여사원들이 험한 소리로 욕을 해 대던 걸 부장은 알까. 모르겠지만. 야, 들었냐, 마츠노? 너 어떻게 하냐 평생 동정으로 늙어 죽겠네! 부장이 낄낄 웃으며 카라마츠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신나게 두들겨댔다. 몸이 크게 흔들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등이 아렸다. 속에서 방금 전 마신 맥주가 올라올 것 같다. 카라마츠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부장이 아 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이, 마츠노, 그거 해 봐 그거.”

 “네?”

 “아 그거 있잖아, 너 특기. 혹시 아냐, 이케다 부장님께서 그 쪽 회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이 있다고 소문 내 주실지.”


 그런 거라면 직접 하시죠. 카라마츠는 말을 삼키며 그저 웃었다. 분명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한 윗사람들 눈에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어떻게 보이거나 상관없다. 해야 하니까. 망할. 항상 이렇지.


 “아 저 녀석, 학교 다닐 때 연극부였거든요~ 주연도 맡았었다나 뭐라나. 야, 너 저번에 했던 그거 한 번 보여드려.”


 신입사원 시절, 눈에 잘 들기 위해 술자리에서 객기를 부렸던 이후로 부장은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카라마츠에게 연기를 시켰다. 이유는 뻔하다. 연극은 신데렐라, 그리고 각색을 해서 왕자가 신데렐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 구두를 신겨 준다. 처음 했을 때에는 대 호평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여직원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겨 주는 시늉을 했을 때에는. 그 이후로 계속 이 지경이었다. 신발만 여직원의 것이 아니라 구린내 나는 부장의 것으로 바뀌었을 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주세요.


 “이야~ 뭐야, 연극부? 엄청 레어한데요. 좀 봅시다, 마츠노 씨.”


 그래, 언제나 이런 전개지. 부장은 어디서 그런 사람만 골라와 미팅을 잡는지, 그 누구도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남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눈에 차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거지!”


 부장이 몸을 밀어붙이는 기세에 밀려, 카라마츠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섰다. 두 술꾼이 한쪽은 호기심으로, 다른 한 쪽은 만족으로 가득 차 카라마츠를 바라보고 있다.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내일이 괴롭다.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고 며칠간 큰 소리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남자는 배를 쥐고 웃으며 연신 웃기죠? 웃기네 이 녀석!을 연발했다. 낄낄대는 부장의 발이 눈앞에서 흔들리며 거의 얼굴을 걷어찰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고 앉아도 모를 정도로 부장은 웃음에만 열중했다. 무어가 그리 자랑스러운 건지. 그래,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거 우리 회사 젊은 놈들에게 좀 보여 줘야겠네요, 카츠노 씨처럼 패기가 있어야지! 상대사 부장은 자기 회사 젊은 직원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젊은 직원들이 사라지는 이유도 카라마츠의 성을 틀리게 부른 것도. 카라마츠는 계속 웃기만 하며 술잔에 몰래 부을 물을 찾았다. 잔이 계속 차 있는 걸로 보여야 했다. 슬슬 먹먹해지는 시선이 테이블 위를 어지럽게 움직이다, 술집의 복도 끝으로 내달렸다.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 아니면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대부분 검거나 어두운 옷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온통 흰색으로 감싼 그의 차림은 이질적이었다. 옷과 맞춤한 흰색 모자 아래에서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꾸 노려보는 거지. 카라마츠는 모르는 척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의 주변에서 검은 옷의 거한 몇이 꿈질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얽히고 싶지 않다. 되도록 빨리, 무사히 이 영감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 

 가게 안쪽, 룸의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검은 옷의 남자들이 움직였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던 사람들은 거한들과 마주치자 금방 굳어 버렸다. 뭐지, 이 상황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엉망으로 편집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한들이 이제 막 나온 사람들을 다시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들 뒤를 따르며 흰 옷의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거한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보아 지시를 내릴 지위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방으로 밀어 넣으며 거한들도 벽 너머로 사라졌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하품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즐겁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뭔가 다른.

 그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남자는 방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가게는 그저 사람들 소리로 부산할 뿐이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인간 몰이는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눈앞에는 술에 취해 신인 여배우에 대해 저속한 어휘로 평가를 내리는 중년의 남자 둘만 남았다. 여우에게 홀린 걸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어디 감히 반대하냐고(뭔지는 모르겠지만) 상사에게 머리를 맞았다.








 아저씨들의 술 파티는 두 대의 택시에 한 쪽은 실려서, 다른 한 쪽은 비틀대는 발로 들어가 떠난 뒤에야 끝이 났다. 부장급 이상은 택시비를 지원해주지만, 카라마츠 같이 말단은 택시비조차 지원받지 못한다. 이곳을 지나는 막차는 카라마츠의 집까지 가지 않는다. 가다가 어딘가에서 내려 몇 십 분 정도 걸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부터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카라마츠는 눈에 보이는 아무 화단에 걸터앉았다. 속에서 액체와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걸으면 넘칠 정도로. 머리를 무언가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서늘한데 얼굴만이 끊임없이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어디더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려는데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세 번쯤 입력을 실패한 후에야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거한 두 사람이.


 “아, 저, 무, 무슨 일이신가요?”


 긴장으로 온 몸의 근육이 굳었다.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생각한 그대로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보스가 부르신다. 따라 와.”


 보스고 뭐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놈의 보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큰길가로 통하는 길목 쪽에 검은 색의 커다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무심한 듯 끈질기게 차 쪽을 향했다. 거래처 직원 중 누군가의 드림 카라던 외제차였다.


 “저, 저는 아무 짓도,”


 대답은 통하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해 보이는 팔뚝이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들었다. 엉망인 몸은 너무 쉽게 차 쪽으로 끌려갔다. 그나마 머리채를 붙들려 아스팔트를 온통 쓸며 질질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라니. 어쩐지 속에서 뜨겁고 불쾌한 것이 울렁였다. 술에 취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뭐야, 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멋대로 일반 시민을 끌고 가는 거야.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지고 뜨거운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려 애를 썼다. 이거 놔, 경찰을 부를 거야, 너희들이 뭔데 나를 끌고 가, 빌어먹을 상사 놈, 빌어먹을 거래처 놈. 그놈들은 택시 타고 편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 왜 나는 길거리에서 야쿠자에게까지 위협을 당하고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다 이 시간까지 일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회사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이나 마시던 너희가 나빠! 하지만 카라마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깨를 붙든 손을 털어내며 알아서 걷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거한들이 의외로 순순히 몸을 놓아 주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새도 없이, 카라마츠는 그대로 밀려들어갔다. 이렇게 그 방에 사람들을 밀어 넣었던 건가, 몸이 심하게 흔들려 엉덩방아를 찧다시피 주저앉았다. 쓰러질 뻔하던 몸이 가벼운 충격과 함께 겨우 멈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올려다보았다.


 “Buonasera!”


 아까 그 흰색 남자였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알지 못하는 단어를 내뱉으며 남자가 팔을 벌렸다. 카라마츠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껌벅였다. 본능적으로 척추를 타고 한기가 오르내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외국인인가. 어딜 봐도 일본인, 그나마 다른 가능성을 연다면 한국인이나 중국인 정도로 보이는데. 어쩌면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일 수도 있지, 일본 선술집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도 그렇고.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남자가 쓴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차도 외국 차구나. 타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넓었던 건가.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눈만 굴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모자를 벗으며 남자가 히죽 웃었다. 드러난 덧니가 날카로워 보였다. 웃는 듯 훑어보는 시선처럼. 어쩐지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달라붙는 눈길이 끈질겼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만한 공간도 없었지만.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구, 굿 이브닝?”


 남자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탈리아 어 모르나? 뭐, 상관없지. 내가 일본어로 하면 되니까.”


 유창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본어였다. 뭐야, 그냥 일본인이었잖아. 괜히 놀리려고 한 건가.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카라마츠는 낡은 가방을 꼭 붙든 채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애를 쓰기는 했다. 남자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라마츠는 뒤로 꼼질꼼질 물러나며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녹음 어플리케이션이라도 켜 놓아야 하지 않을까. 손가락으로 액정화면을 긁으며 카라마츠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뭐, 뭡니까.”

 “그 쪽에게 볼 일이 있어서.”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돈 문제인 걸까. 빚은 천지이지만 사금융에서 돈을 빌린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 장기를 떼이는 일은 없었던 게 다행이다. 나에게 돈이라니 어이도 없지. 꼬질꼬질한 회사원에게 무슨 돈을 뜯어내려는 건가. 저 머리에 대충 얹힌 모자만으로도 내 통장 잔고를 훌쩍 뛰어넘을 텐데. 글쎄 뭐, 내 장기를 팔면 저 모자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된 생각이 증발했다. 지금 느끼는 것이 긴장감인지 짜증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신, 목소리 좋던데.”


 그나마 떠오르던 몇 가지 말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걸 봤다고? 지저분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사를 읊던 꼬락서니를 봤다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보았기를 바랐던 모습을 봤다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 퍼포먼스 한 번 더 보고 싶어. 보여 줘.”

 “왜죠?”

 “다시 보고 싶으니까.”


 미친 놈 아니야, 카라마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집에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한다는 말이 겨우 연기 보여 달라는 건가.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자신이 무릎을 꿇을 때 마다 실실 웃는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저 짓을 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차라리 돈이라도 내던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입술을 다시 한 번 세게 깨물자 제멋대로 내달리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신은 달리는 차 안에 갇혀 있고 앞에는 덩치가 둘이나 있다. 이 남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덩치들이 보스로 모시며 턱짓 하나에 움직이고 있다면 분명 야쿠자나 그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선택권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나갈 수는 더더욱 없고 나간다 해도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이 외국인인지 뭔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 나았다. 거절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보고 나면, 보내 줄 겁니까?”

 “물론.”


 그래,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할까. 부장보다는 낫겠지. 이 남자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칸막이는 단단하게 닫혀 있어 사실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기는 무대다. 진짜 무대에는 단 한 번도 올라서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대다. 눈을 뜨자 살짝 넓은 차 안이 좀 더 넓은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 중 하나다. 카라마츠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대사가 끝났다. 깊은 숨과 함께 카라마츠는 이상입니다, 하고 중얼대며 시트에 앉았다.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은 채로 끊임없이 카라마츠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스쳐지나갈 때 보다 더욱 사람을 납치해서까지 보여 달라고 졸라댈 때는 언제고, 막상 보니 실망한 건가. 그런 거면 차라리 그냥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저, 다 끝났는데요….”


 남자가 퍼뜩 놀라며 눈을 크게 깜박였다.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설마 얼굴 뻘개질 정도로 화가 났나? 아, 그냥 아까 저 덩치들이 말을 걸었을 때 바로 도망갈걸 그랬어. 이 남자라면 카라마츠 같은 소시민 하나는 사회에서 쉽게 지울 수 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의 안전은 이 좁은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부장의 고함소리는 차라리 훨씬 더 논리적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남의 생명을 얼마든지 망가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의 명줄을 손에 쥐고 있다. 고작 연기 한 씬을 가지고.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내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 꽉 붙들어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술기운이 날아갔다. 


 “Bravo!”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손뼉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남자의 표정은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옷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낸 아이의 얼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심장을 콕콕 찔렀다. 의외네, 야쿠자인지 뭔지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뭐야, 아까보다 더 잘 하잖아. 굉장히 마음에 들어. 목소리도, 발성도, 표정도, 연기도,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좋은데.”

 “가, 감사합니다…?”

 “그 부분이 좋아. 주방에서 나온 신데렐라에게 말을 걸 때. 이 사람인가, 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눈빛이. 왕자가 확실히 신데렐라에게 반해 있고 그녀를 기억한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어. signore, 당신 대단한 걸.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없는데. 특히 목소리. 연기하는 톤도 그냥 말할 때도 모두 듣기 좋아. 깨끗하고 명확해.”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였다. 학생 때에는 그저 외우기에 급급했고, 술자리에서 수십 번을 되풀이 할 때에는 웃음만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울컥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사람이란 단순하구나. 그렇게 들끓어 오르던 생각이 말 한 마디에 풀어지니.


 “감사의 뜻으로 집에 모셔다 드리지, signore. 집이 어디야?”

 “아카츠카 구, 나카무라쵸….”

 “어이, 들었지? 여기서 별로 안 멀군. 그 쪽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곧 이어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이 차가 아직 움직이지 조차 않았다는 걸 알았다. 생각이 널을 뛰어 차가 움직이는 것조차 몰랐다니, 정말 우습지도 않다. 어쩌면 당장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창밖의 풍경이 뒤로 달아나며 달각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갈 수 없다. 상황은 다 끝났는데도. 

 그래도 거한들에게 붙들려 차에 탈 때 보다는 조금 나았다. 적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꽤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몸이 서서히 나른해졌다. 아, 다행이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어서.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이불 속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 어차피 서너 시간 밖에 못 자겠지만.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카라마츠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옆에서 몇 번인가 가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 복권에라도 맞지 않는 한 이런 차는 탈 수 없겠지. 탄 김에 찬찬히 기억해 두자. 스스로 생각해도 촌스러운 짓이었지만 어차피 이 남자와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이 차, 마음에 들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펄쩍 뛰며 가방을 끌어안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자가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귀 옆에서 나른하게 울렸다. 온 몸으로 소름이 퍼져나갔다. 


 “마, 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제 차도 아니고.”

 “가지고 싶어?”

 “됐습니다.”

 “헤에, 뭐야. 농담이라고, 놀랄 필요 없어. 하지만 그런 연기력이었다면 진즉 스타가 되어서 이런 차 정도는 그냥 끌고 다녔을 텐데. 성우라도 할 수 있었을 걸. 연극부였다고 했지?”

 “그 새 들었군요….”

 “함께 있던 그 뚱땡이가 그렇게 크게 말하는데 못 들을 리가 있나. 그런데 그 자식 못 쓰겠더라, 젠장. 보기만 하는데도 발 냄새가 다 올라오는 것 같더라니. 다리에 털도 있고. signore의 연기력은 그런 녀석 신발이나 신겨 주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니까요.”


 집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늘 전철에서 바라보는 거리지만 정작 그 속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으려니 어색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저 쪽에 있는 건물을 보아하니 나카노 역 근처인가. 빨리 도착하면 좋을 텐데. 남자의 손이 목을 둘러 어깨를 쥐었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전에 몸에 소름을 넘어 한기가 올라왔다. 뭐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야. 외국에서는 다 이런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감싸 잡고 그러나?


 “뚱땡이 같은 건 됐어. 저런 놈의 면상에 샷 건을 갈길 수도 없다니 회사원 생활도 장난이 아니군. 어쨌거나 그 정도면 스카우트도 받았을 것 같은데. 잘 안 됐나 봐?”

 “아뇨, 저 무대 올라간 적 없습니다.”

 “엑, 거짓말! 어째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극부였지만 무대에 제대로 오른 적이 없었다. 1학년 때에는 무대도구를 만들거나 무대 뒤에서 보조를 했고, 2학년 때에는 말 한 마디 없이 뒤를 지나가는 단역으로 끝이었다. 3학년 때에 가서는 부원 사이의 이지메와 성추행 문제에 휘말려 여자 부원 일부와 남자 부원 대다수가 나가 버렸다. 폐부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남은 사람들끼리 꾸려가자고 선택한 것이 신데렐라였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여성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왕자 역할은 자동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3학년 남자부원인 카라마츠의 차지가 되었다.

 3학년이었고,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연극이었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필사적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탈퇴 부원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신경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학교 축제는 시작도 하기 전 화학부에서 화재를 일으켜 중지되었다. 강당은 무사했지만 학생 하나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실려 갔으니 중지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 달에 한 번 이상 술자리에서 지겹게 아저씨의 신발을 신겨 주고 있으니, 뭐 어떻게든 무대에는 오른 셈인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며 웃거나 가엾어 하기만 했을 뿐 사정은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았자면 다른 의미로 매일 언급되었을 테니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자신은 긴장한 건가 마음이 풀어지고 있는 건가.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어대다니.


 “아깝네. 정말로.”

 “그렇죠. 뭐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어깨에 있던 손이 목 뒤로 옮겨왔다. 맨살에 조금 차가운 손이 닿으니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목을 누르는 힘에 남자의 얼굴 쪽으로 끌려갔다. 가깝다. 너무나 가깝다. 나른한 듯 일렁이며 빛나는 눈이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다. 향수 냄새가 짙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숨소리가 다가온다. 뒤로 물러나 보았지만 몸이 붙들린 이상 별 소용이 없다. 코끝이 닿을 것 같다. 외국인이라도, 이렇게는 안 할 거야!


 “좋아, 음, 뭐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아니지 오히려 괜찮네, 무대에 정말로 올라가서 명성을 얻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귀찮았겠군. 이렇게 별빛처럼 빛나는 사람이 정말 하늘에 떠 있었다면 잡기 힘들겠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그대로. 목을 누르던 손에 힘이 더해진다. 숨결이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아니 코가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향수 냄새가, 아니 잘 모르는 담배 냄새가 아직 남아 있던 알코올과 섞여 뇌를 어지럽힌다. 남자의 눈빛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마치 무언가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입술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이상하게 우그러지는 비명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남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퉁퉁 두들겼지만 다른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야쿠자는 야쿠자인가, 남자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악스러웠다. 입술이 몇 번인가 부딪혔다가, 곧이어 입 속으로 살덩어리가 들어왔다. 온 몸에 경보가 울렸다. 소름보다 더 대단한 느낌에 온 몸이 굳었다. 이건, 뭐야, 이건, 아니잖아. 나는 그냥, 그냥 끌려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런데 마음대로 어깨에 손을 얹고, 목덜미를 만지고, 키스를 하고, 심지어 첫 키스인데, 남자의 혀가 자신의 것을 꾹 눌렀다. 타액이 섞였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오만가지 감정과 알코올과 남자의 체취가 얽혀 정신이 아득해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남자의 옷깃을 꾹 쥐었다. 몸이 뜨거워지는 건지 숨을 못 쉬어 죽어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남자가 물러섰다. 할딱대며 숨을 고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뭐야, 키스는 익숙하지 않은 건가?”


 뭔 소리인지 해석조차 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상황을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생각은 헛돌기만 할 뿐 제대로 가닥이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추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아쉽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카라마츠도 멍하니 반대편 창 바깥을 훑었다. 아는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집이다. 아, 그래, 집이지. 다 왔구나. 이제 언제든 내리기만 하면 되는구나. 문이 달각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배실배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남자의 풀어진 얼굴과, 방금 전 입술을 닦아낸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군. 그렇지만 나는 이 만남을 한 번으ㄹ커헉?!”


 시트 위로 배를 부여잡고 거꾸러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카라마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괜찮은 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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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종일 고함과 타자 소리와 쓸데없는 웃음소리를 들은 귀가 멍멍했다. 눈이 시큰거려 더 이상 모니터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곧 막차 시간이다. 지금 가지 않으면 회사에서 자거나 키보드와 씨름해야 한다. 카라마츠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자신과 다른 직원들은 사흘간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사건의 원흉들은 정시퇴근 했다. 그래도 이틀간 전화를 돌리고, 보고서를 새로 만들고, 격렬하게 회의를 거치며 온 회사를 여기저기 휘젓고 돌아다닌 끝에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나머지는 어차피 지금 할 수 없으니 아침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녹초가 된 다른 부서 사람들이 책상 위에서 졸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흐릿하게 인사를 하니 답례가 흐릿하게 되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것 같았는데 벌써 1층이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 정문은 이미 잠겨 있었고, 쪽문 옆 경비실 수위 아저씨가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카라마츠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다. 그리고 당장에 후회했다. 아, 그냥 하루 더 회사에 있을 걸.

 화려한 외제차가 회사 앞 도로변에 서 있었다. 주차 구역은 깨끗하게 무시한 채. 딱지니 견인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차에 기대어 있던 흰 옷에 흰 모자를 쓴 중키의 남자가, 카라마츠를 발견하자 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희미하게 담배 연기가 허공에 퍼져나갔다. 사흘이나 철야를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Buonasera, 마츠노 카라마츠 씨.”


 잠이 달아났다.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여기에서 도망가야 할까.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수백 가지의 의문이 머릿속에서 터져나가며 마음에 먹칠을 했다. 피곤과 경악에 절어버린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는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드럼통에 시멘트와 함께 묻힌다. 장기가 모조리 뜯겨나가 팔린다.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소리가 갈려 나왔다.


 “여긴, 어, 어떻게.”

 “명함.”


 명함?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잠시 몸이 얽혔을 때 가방이 떨어지고 명함이 흩어졌고…. 그 때 슬쩍한 모양이었다. 야쿠자쯤 되면 손도 재빨라야 하는 모양이다.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카라마츠의 앞에 섰다. 그 날 차 안에서 맡았던 담배 냄새가 숨통을 막았다. 설마 머리채든 어디든 잡고 끌고 가려는 걸까.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도망갈 수 없다. 카라마츠는 발끝만 바라보며 남자의 사형 선고를 기다렸다.


 “사흘간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손은 대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카라마츠를 뚫어 버릴 듯이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생각보다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배를 호되게 걷어찬 녀석을 바라보는 것 치고는. 의외였다. 이런 쪽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 한 덩어리보다 자신의 피해 한 톨이 더 크게 보일 줄 알았는데.


 “…처, 철야였습니다만.”

 “철야? 밤새는 거? 회사에서? 그래도 그렇지 사흘 동안이나? 일본의 회사들은 대부분 이렇게 며칠씩 사람을 잡아 두나?”

 “회사마다 다르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카라마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엉뚱한 걸 궁금해 하는 거지. 키스 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으니 화가 나 족치러 오는 건 이해가 가지만, 보통 그런 상대의 사생활까지 물어보나? 차라리 지금 너의 장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물어보는 쪽이 어울릴 텐데. 


 “이틀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는 나오지도 않고, 설마 앓아누웠나 했더니 밤이 되어도 집에 불이 켜지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은 전화를 걸어볼까 했는데 내내 전원도 꺼져 있고, 회사 전화는 퇴근 시간 까지 통화 중이고. 뭐야, 이거. 일본인은 부지런하다고는 들었지만 이건 부지런이 아니라 사람을 레몬 즙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잖아.”


 아, 맞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 전화 할 사람도 없고, 스마트폰이지만 뭘 들여다 볼 시간도 없다. 기껏해야 알람 기능 정도가 필요하지만 회사 전화라니, 사흘간은 콜센터나 다름없었으니 내내 통화중이었겠지. 

 남자가 손을 슥 들었다. 아, 이번에는 진짜 잡힌다. 끌려간다. 

 뺨에 살짝 서늘한 손이 닿았다. 광대뼈를 몇 번인가 쓸던 손이 눈 아래 연약한 살을 만지작댔다. 간지럽다. 기분이 이상하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눈길을 이해할 수 없다. 뭐지, 이건 또 뭐야?


 “당신 얼굴도 목소리도 아주 엉망이야. 젠장, 이 아까운 걸 이렇게….”


 귓불에 손가락이 스친다. 소름이 돋는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번에는 주먹이었다.


 “커흐억!”


 남자가 바닥에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명치를 감싸 쥔 채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는 모습을 보고서야 카라마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또 저질렀다. 이제는 진짜 죽는다. 이 자리에서 도륙당하고 말 것이다. 장기 적출이고 드럼통이고 뭐고 기계에 내던져져 뼈조차 남지 않고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에게 끌려가 억지로 보아야 했던 고어 영화의 고문 살해 장면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그게 누구였더라, 부장이었던가 옆 부서 차장이었던가. 그리고는 술을 물이라며 속여 마시게 하고, 다섯 번인가 신발을 신기게 하고. 그 다음 날에는 숙취에 절어 늦잠을 잔 주제에 감기에 걸렸다며 일을 모조리 떠넘기고는 이틀간 안 나오고. 안 좋은 기억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장은 조롱하거나 화만 내고, 옆에서는 일을 밀어놓거나 무시하고, 돈 때문에 도망갈 수조차 없고, 요즘도 그래, 사흘간 남의 뒤처리를 하고, 이름조차 남자에게는 사흘간 두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 이게 다 뭐야?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빚 때문에 이딴 회사라도 다녀야 하는 게 잘못이야? 이런 곳에서라도 열심히 일 해서 사회에 폐 끼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게 잘못이야? 만나는 사람들마다 왜 나를 제멋대로 굴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 그렇게 웃겨? 사람이 그렇게 우스워?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사람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그저 못 본 척 하면 끝이야? 빚을 다 갚지 못해 감방에 끌려가거나, 회사에서 숨이 막혀 죽거나, 야쿠자에게 끌려가 산 채로 정육 기계에 내던져지거나, 어차피 똑같다. 어차피 죽는다.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주먹 한 방으로 날아가지 않은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부글대다, 다시 터졌다. 


 “웃기지 마, 이 성추행범, 도둑, 스토커!”


 기침을 내뱉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젠장,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은 아니지만 너 때문이야! 갈 곳 없는 마음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이 남자가 이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갔다. 생각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고함을 지르는 목구멍 안쪽에서 단내가 났다.


 “네가 뭔데 나를 마음대로 만져?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광대 짓이나 하라고 강요하고, 그래서 내가 당신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줬다고 멋대로 만져도 된다는 거야? 그 쪽이 뭐 하는 족속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만지작댈 권리는 없어! 또 만지러 온 거면 꺼져!”

 “꺼지라고오?”


 남자가 훅 일어섰다. 갑자기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크게 숨을 뱉었다. 바닥을 구르던 꼴사나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보이는 것은 서늘한 눈길뿐이었다. 눈빛이 날카롭다. 베일 것 같다. 


 “권리?”


 척추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었다.


 “너한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딴 회사에서 찌들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주제에, 너에게 무언가를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너는 어차피 밑바닥인데. 밑바닥이면 밑바닥답게 주제 파악하지 그래? 겨우 붙들고 있는 그 목숨이나마 지키려면.”


 낮게, 나른하게, 달짝지근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뇌에 스며들었다.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것처럼. 머리를 짓누른다. 몸이 한없이 작아진다.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 비해 그저 하찮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말단의 말단 인생일 뿐이고. 그러니까,

 아냐!

 나는, 사람이야!

 힘을 실어 날린 주먹은 어이없이 허공에 붙들렸다. 힘이 장난이 아니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 두어 번 용을 써 보았지만 남자의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남자가 호오, 이제 좀 살아났네, 하고 중얼대는 말이 더욱 거슬렸다. 온 몸에 까슬까슬한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는 거칠게 주먹을 털어냈다. 상대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카라마츠의 주먹을 밀어낸 남자가 킬킬 웃었다. 몸 전체를 베어내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후우, 당신, 정말로 제대로 때리는 방법은 잘 모르나 보군. 저번에도 방금 전에도 기습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달라. 눈에 다 보인다고. 새끼고양이가 허공에 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데. 맞아줄 걸 그랬나, 얼마나 아픈가 보게.”

 “그러면 그냥 맞지 그랬습니까?”


 한 번 울컥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뭐지, 이 녀석은. 제멋대로 사람을 만지작대다 살벌하게 굴다 다시 장난을 치다가. 야쿠자라는 족속은 다 이런가? 아니면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간 보려고 놀렸던 건가? 이 남자에게 아양 떨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드럼통에 담겨 바다에 빠진대도.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니 남자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식은 뭐 저렇게 실실 웃고 난리야 사람보고.


 “미안, 놀릴 생각은 없었어. 내가 좀 과했군. 좀 더 친해지고 서로의 마음이 좀 더 통한 다음에 스킨십을 했어야 했는데, 당신 목소리가 꼭 막 짜낸 꿀 같아서. 이런 달콤한 목소리가 묻어나오는 입술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그만 실수해 버렸어.”

 “여러 가지로 굉장하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렇고.”

 “정말이야, 사흘 동안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다시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고. 연락도 되지 않아서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결국 스토커 같은 짓까지 해 버렸군. 정말로 미안해. 그 때도 이번도 명백히 내 잘못이야. 사과의 뜻으로 집까지 데려다 주지. 어때? 시간도 많이 늦었고, 피곤해 보이는데. 당신 목소리, 정말 꽉 잠겼어. 그 목소리조차도 듣기 좋지만.”

 “왜요? 설마 또 차 안에서 성추행하려는 겁니까?”

 “아니야. 맹세하지, 이번에는 얌전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내가 데려다 주고 싶어서 그래. 부하들도 오늘은 없어. 우리 둘이서만 짧은 드라이브를 즐기면 돼.”

 “그거 참 편하네요.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요구하면 되다니.”


 뾰족하게 내지르는 말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민다. 뭡니까, 하고 바라보는 눈길에 남자가 당연히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나? 하고 되물어 왔다. 보통 이런 일은 여자에게 하지 않던가. 뭐 동성 커플도 시부야에 가면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성별은 중요하지 않지만, 이 남자 정도라면 적어도 좀 더 어리고 잘생긴 남자애를 고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피곤에 찌든 말단 회사원에게 옆자리에 같이 타 달라고 청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거절하기조차 귀찮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차에 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고, 어차피 이 남자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막차는 끊겼다. 자신을 두 번이나 성추행하려 든 남자의 차에 타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믿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걷기 너무나 힘들었다. 왠지 왼쪽 발목이 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걷어찬 건 사흘 전의 일인데. 내가 정말 미쳤구나, 피곤하다고 성추행범 차를 냉큼 올라타고. 


 “알았어요. 탈게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냉큼 조수석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가 자리에 몸을 파묻은 뒤에는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워주기까지 했다. 문까지 손수 닫은 남자가 종종 뛰어 운전석에 앉았다. 어제는 덩치 큰 운전사들이 정중하게 모시던 사람이 말이지. 이제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 남의 일 같았다. 알긴 알아, 이거 드라마에서 봤지. 꼭 신데렐라 스토리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자주 봤었어.

 나는 신데렐라는 아니지만.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가 시큰했다. 눈을 뜨니 시야가 이상하게 흐려져서 다시 감았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버스보다 훨씬 나직하다. 좋은 차는 다르구나, 사흘 전의 그 차도 그랬는데.


 “그런데요.”

 “뭐지, gattino?”


 이상한 단어가 끼어들어간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을 했어요? 내 목소리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당신을 두 번이나 때린 사람에게 화도 안 날 정도로. 사실 아까 날 기다리는 당신을 봤을 땐 나를 드럼통에 집어넣거나 다진 고기로 만들 줄 알았거든요…. 그것도 운명의 데스티니겠지만.”

 “운명의 데스티니라니, gattino도 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래, 하루 종일 듣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지만 gattino의 매력은 목소리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당신 연기를 보았을 때에도 입술을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좋았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당신도 굉장히 사랑스러워.”

 “…당신 머리 괜찮아요?”

 “물론.”

 “지금 그거, 꼭 당신이 저에게 반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당신이 생각한 그대로가 맞아.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흘간 얼마나 괴롭던지. 당신만 생각이 나서 도저히 떨어낼 수가 없었다고. 건물에서 나오는 당신 얼굴 보니까 내가 다 아팠는걸. 거의 죽을 사람처럼 되어선. 계속 만지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체온을 나누고 싶고,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카라마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성추행범의 차에 앉아서 들을 말로 적당한가? 차라리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일어난 일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흘려보내면 되니까. 얼굴이 뜨겁다. 이 상황을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적어도 하룻밤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전 남자인데요. 시부야에서는 동성 결혼이 가능하지만.”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이치마츠라고 불러. 당신 이름은 아니까 됐고.”

 “당신이 뭐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마피아.”


 잠이 확 달아났다. 카라마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안전벨트에 짓눌려 다시 시트에 누웠다.

Posted by *루미*
2016. 8. 15. 23:53

이치카라 AU/ 돈이치x히라카라(돈히라)

1편 / 2편 / 3편


*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용도로 일정분량 완성할 때마다 올립니다.

* 이 글은 퇴고를 거쳐 카라른 온리에 동인지로 낼 예정입니다.

* 그래서 아마 중반부까지만 연재하고 나머지 미공개분은 동인지로 확인해주세요ㅠㅠ 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루 종일 고함과 타자 소리와 쓸데없는 웃음소리를 들은 귀가 멍멍했다. 눈이 시큰거려 더 이상 모니터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곧 막차 시간이다. 지금 가지 않으면 회사에서 자거나 키보드와 씨름해야 한다. 카라마츠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자신과 다른 직원들은 사흘간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사건의 원흉들은 정시퇴근 했다. 그래도 이틀간 전화를 돌리고, 보고서를 새로 만들고, 격렬하게 회의를 거치며 온 회사를 여기저기 휘젓고 돌아다닌 끝에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나머지는 어차피 지금 할 수 없으니 아침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녹초가 된 다른 부서 사람들이 책상 위에서 졸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흐릿하게 인사를 하니 답례가 흐릿하게 되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것 같았는데 벌써 1층이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 정문은 이미 잠겨 있었고, 쪽문 옆 경비실 수위 아저씨가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카라마츠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다. 그리고 당장에 후회했다. 아, 그냥 하루 더 회사에 있을 걸.

 화려한 외제차가 회사 앞 도로변에 서 있었다. 주차 구역은 깨끗하게 무시한 채. 딱지니 견인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차에 기대어 있던 흰 옷에 흰 모자를 쓴 중키의 남자가, 카라마츠를 발견하자 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희미하게 담배 연기가 허공에 퍼져나갔다. 사흘이나 철야를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Buonasera, 마츠노 카라마츠 씨.”


 잠이 달아났다.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여기에서 도망가야 할까.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수백 가지의 의문이 머릿속에서 터져나가며 마음에 먹칠을 했다. 피곤과 경악에 절어버린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는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드럼통에 시멘트와 함께 묻힌다. 장기가 모조리 뜯겨나가 팔린다.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소리가 갈려 나왔다.


 “여긴, 어, 어떻게.”

 “명함.”


 명함?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잠시 몸이 얽혔을 때 가방이 떨어지고 명함이 흩어졌고…. 그 때 슬쩍한 모양이었다. 야쿠자쯤 되면 손도 재빨라야 하는 모양이다.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카라마츠의 앞에 섰다. 그 날 차 안에서 맡았던 담배 냄새가 숨통을 막았다. 설마 머리채든 어디든 잡고 끌고 가려는 걸까.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도망갈 수 없다. 카라마츠는 발끝만 바라보며 남자의 사형 선고를 기다렸다.


 “사흘간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손은 대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카라마츠를 뚫어 버릴 듯이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생각보다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배를 호되게 걷어찬 녀석을 바라보는 것 치고는. 의외였다. 이런 쪽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 한 덩어리보다 자신의 피해 한 톨이 더 크게 보일 줄 알았는데.


 “…처, 철야였습니다만.”

 “철야? 밤새는 거? 회사에서? 그래도 그렇지 사흘 동안이나? 일본의 회사들은 대부분 이렇게 며칠씩 사람을 잡아 두나?”

 “회사마다 다르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카라마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엉뚱한 걸 궁금해 하는 거지. 키스 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으니 화가 나 족치러 오는 건 이해가 가지만, 보통 그런 상대의 사생활까지 물어보나? 차라리 지금 너의 장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물어보는 쪽이 어울릴 텐데. 


 “이틀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는 나오지도 않고, 설마 앓아누웠나 했더니 밤이 되어도 집에 불이 켜지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은 전화를 걸어볼까 했는데 내내 전원도 꺼져 있고, 회사 전화는 퇴근 시간 까지 통화 중이고. 뭐야, 이거. 일본인은 부지런하다고는 들었지만 이건 부지런이 아니라 사람을 레몬 즙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잖아.”


 아, 맞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 전화 할 사람도 없고, 스마트폰이지만 뭘 들여다 볼 시간도 없다. 기껏해야 알람 기능 정도가 필요하지만 회사 전화라니, 사흘간은 콜센터나 다름없었으니 내내 통화중이었겠지. 

 남자가 손을 슥 들었다. 아, 이번에는 진짜 잡힌다. 끌려간다. 

 뺨에 살짝 서늘한 손이 닿았다. 광대뼈를 몇 번인가 쓸던 손이 눈 아래 연약한 살을 만지작댔다. 간지럽다. 기분이 이상하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눈길을 이해할 수 없다. 뭐지, 이건 또 뭐야?


 “당신 얼굴도 목소리도 아주 엉망이야. 젠장, 이 아까운 걸 이렇게….”


 귓불에 손가락이 스친다. 소름이 돋는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번에는 주먹이었다.


 “커흐억!”


 남자가 바닥에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명치를 감싸 쥔 채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는 모습을 보고서야 카라마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또 저질렀다. 이제는 진짜 죽는다. 이 자리에서 도륙당하고 말 것이다. 장기 적출이고 드럼통이고 뭐고 기계에 내던져져 뼈조차 남지 않고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에게 끌려가 억지로 보아야 했던 고어 영화의 고문 살해 장면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그게 누구였더라, 부장이었던가 옆 부서 차장이었던가. 그리고는 술을 물이라며 속여 마시게 하고, 다섯 번인가 신발을 신기게 하고. 그 다음 날에는 숙취에 절어 늦잠을 잔 주제에 감기에 걸렸다며 일을 모조리 떠넘기고는 이틀간 안 나오고. 안 좋은 기억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장은 조롱하거나 화만 내고, 옆에서는 일을 밀어놓거나 무시하고, 돈 때문에 도망갈 수조차 없고, 요즘도 그래, 사흘간 남의 뒤처리를 하고, 이름조차 남자에게는 사흘간 두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 이게 다 뭐야?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빚 때문에 이딴 회사라도 다녀야 하는 게 잘못이야? 이런 곳에서라도 열심히 일 해서 사회에 폐 끼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게 잘못이야? 만나는 사람들마다 왜 나를 제멋대로 굴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 그렇게 웃겨? 사람이 그렇게 우스워?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사람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그저 못 본 척 하면 끝이야? 빚을 다 갚지 못해 감방에 끌려가거나, 회사에서 숨이 막혀 죽거나, 야쿠자에게 끌려가 산 채로 정육 기계에 내던져지거나, 어차피 똑같다. 어차피 죽는다.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주먹 한 방으로 날아가지 않은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부글대다, 다시 터졌다. 


 “웃기지 마, 이 성추행범, 도둑, 스토커!”


 기침을 내뱉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젠장,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은 아니지만 너 때문이야! 갈 곳 없는 마음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이 남자가 이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갔다. 생각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고함을 지르는 목구멍 안쪽에서 단내가 났다.


 “네가 뭔데 나를 마음대로 만져?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광대 짓이나 하라고 강요하고, 그래서 내가 당신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줬다고 멋대로 만져도 된다는 거야? 그 쪽이 뭐 하는 족속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만지작댈 권리는 없어! 또 만지러 온 거면 꺼져!”

 “꺼지라고오?”


 남자가 훅 일어섰다. 갑자기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크게 숨을 뱉었다. 바닥을 구르던 꼴사나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보이는 것은 서늘한 눈길뿐이었다. 눈빛이 날카롭다. 베일 것 같다. 


 “권리?”


 척추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었다.


 “너한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딴 회사에서 찌들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주제에, 너에게 무언가를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너는 어차피 밑바닥인데. 밑바닥이면 밑바닥답게 주제 파악하지 그래? 겨우 붙들고 있는 그 목숨이나마 지키려면.”


 낮게, 나른하게, 달짝지근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뇌에 스며들었다.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것처럼. 머리를 짓누른다. 몸이 한없이 작아진다.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 비해 그저 하찮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말단의 말단 인생일 뿐이고. 그러니까,

 아냐!

 나는, 사람이야!

 힘을 실어 날린 주먹은 어이없이 허공에 붙들렸다. 힘이 장난이 아니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 두어 번 용을 써 보았지만 남자의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남자가 호오, 이제 좀 살아났네, 하고 중얼대는 말이 더욱 거슬렸다. 온 몸에 까슬까슬한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는 거칠게 주먹을 털어냈다. 상대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카라마츠의 주먹을 밀어낸 남자가 킬킬 웃었다. 몸 전체를 베어내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후우, 당신, 정말로 제대로 때리는 방법은 잘 모르나 보군. 저번에도 방금 전에도 기습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달라. 눈에 다 보인다고. 새끼고양이가 허공에 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데. 맞아줄 걸 그랬나, 얼마나 아픈가 보게.”

 “그러면 그냥 맞지 그랬습니까?”


 한 번 울컥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뭐지, 이 녀석은. 제멋대로 사람을 만지작대다 살벌하게 굴다 다시 장난을 치다가. 야쿠자라는 족속은 다 이런가? 아니면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간 보려고 놀렸던 건가? 이 남자에게 아양 떨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드럼통에 담겨 바다에 빠진대도.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니 남자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식은 뭐 저렇게 실실 웃고 난리야 사람보고.


 “미안, 놀릴 생각은 없었어. 내가 좀 과했군. 좀 더 친해지고 서로의 마음이 좀 더 통한 다음에 스킨십을 했어야 했는데, 당신 목소리가 꼭 막 짜낸 꿀 같아서. 이런 달콤한 목소리가 묻어나오는 입술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그만 실수해 버렸어.”

 “여러 가지로 굉장하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렇고.”

 “정말이야, 사흘 동안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다시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고. 연락도 되지 않아서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결국 스토커 같은 짓까지 해 버렸군. 정말로 미안해. 그 때도 이번도 명백히 내 잘못이야. 사과의 뜻으로 집까지 데려다 주지. 어때? 시간도 많이 늦었고, 피곤해 보이는데. 당신 목소리, 정말 꽉 잠겼어. 그 목소리조차도 듣기 좋지만.”

 “왜요? 설마 또 차 안에서 성추행하려는 겁니까?”

 “아니야. 맹세하지, 이번에는 얌전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내가 데려다 주고 싶어서 그래. 부하들도 오늘은 없어. 우리 둘이서만 짧은 드라이브를 즐기면 돼.”

 “그거 참 편하네요.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요구하면 되다니.”


 뾰족하게 내지르는 말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민다. 뭡니까, 하고 바라보는 눈길에 남자가 당연히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나? 하고 되물어 왔다. 보통 이런 일은 여자에게 하지 않던가. 뭐 동성 커플도 시부야에 가면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성별은 중요하지 않지만, 이 남자 정도라면 적어도 좀 더 어리고 잘생긴 남자애를 고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피곤에 찌든 말단 회사원에게 옆자리에 같이 타 달라고 청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거절하기조차 귀찮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차에 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고, 어차피 이 남자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막차는 끊겼다. 자신을 두 번이나 성추행하려 든 남자의 차에 타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믿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걷기 너무나 힘들었다. 왠지 왼쪽 발목이 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걷어찬 건 사흘 전의 일인데. 내가 정말 미쳤구나, 피곤하다고 성추행범 차를 냉큼 올라타고. 


 “알았어요. 탈게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냉큼 조수석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가 자리에 몸을 파묻은 뒤에는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워주기까지 했다. 문까지 손수 닫은 남자가 종종 뛰어 운전석에 앉았다. 어제는 덩치 큰 운전사들이 정중하게 모시던 사람이 말이지. 이제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 남의 일 같았다. 알긴 알아, 이거 드라마에서 봤지. 꼭 신데렐라 스토리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자주 봤었어.

 나는 신데렐라는 아니지만.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가 시큰했다. 눈을 뜨니 시야가 이상하게 흐려져서 다시 감았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버스보다 훨씬 나직하다. 좋은 차는 다르구나, 사흘 전의 그 차도 그랬는데.


 “그런데요.”

 “뭐지, gattino?”


 이상한 단어가 끼어들어간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을 했어요? 내 목소리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당신을 두 번이나 때린 사람에게 화도 안 날 정도로. 사실 아까 날 기다리는 당신을 봤을 땐 나를 드럼통에 집어넣거나 다진 고기로 만들 줄 알았거든요…. 그것도 운명의 데스티니겠지만.”

 “운명의 데스티니라니, gattino도 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래, 하루 종일 듣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지만 gattino의 매력은 목소리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당신 연기를 보았을 때에도 입술을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좋았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당신도 굉장히 사랑스러워.”

 “…당신 머리 괜찮아요?”

 “물론.”

 “지금 그거, 꼭 당신이 저에게 반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당신이 생각한 그대로가 맞아.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흘간 얼마나 괴롭던지. 당신만 생각이 나서 도저히 떨어낼 수가 없었다고. 건물에서 나오는 당신 얼굴 보니까 내가 다 아팠는걸. 거의 죽을 사람처럼 되어선. 계속 만지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체온을 나누고 싶고,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카라마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성추행범의 차에 앉아서 들을 말로 적당한가? 차라리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일어난 일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흘려보내면 되니까. 얼굴이 뜨겁다. 이 상황을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적어도 하룻밤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전 남자인데요. 시부야에서는 동성 결혼이 가능하지만.”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이치마츠라고 불러. 당신 이름은 아니까 됐고.”

 “당신이 뭐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마피아.”


 잠이 확 달아났다. 카라마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안전벨트에 짓눌려 다시 시트에 누웠다.

Posted by *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