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라 AU/ 돈이치x히라카라(돈히라)
* 구두예약 샘플용으로 앞서 올린 1~3편을 모두 모아 놓았습니다. 1~3편을 읽으신 분들은 굳이 안 보셔도 됩니다.
* 퇴고 전이므로 샘플의 내용과 실제 동인지의 내용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에게 물렸다, 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카라마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개에게 물렸다. 그랬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주변은 부장이 누군가에게 고함치는 소리와 그 와중에 걸려온 클레임 전화로 전쟁통이었고 아무도 카라마츠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부장이 들었다면 부장의 고함을 듣는 사람은 바로 카라마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욕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함을 듣는 시간이 늦춰질 뿐이다. 팀장을 뺀 팀원은 10명, 근무시간은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공식 8시간 비공식 6시간. 하루 한 사람씩 한 시간 동안 붙들고 괴롭혀도 시간이 남는다. 그 중 한 사람은 열외지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울렁거려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움츠려 최대한도로 부장의 시선에서 숨기로 했다.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 날 휴일을 쓴다는 것 같았지만 꿈같은 이야기였다. 근로기준법은 회사의 구성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쓰도록 하지만, 휴가 신청 후 억지로 회사에 나오거나 일거리를 집에 안고 돌아가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이, 마츠노오!”
생각의 끈이 덜컥 끊겼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예에, 하고 되도록 친근한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제발, 차라리 내일까지 완성해야만 할 일감을 몇 개쯤 안겨주는 편이 낫다. 머리는 아프고 속이 울렁이는 이 상황에서 부장의 욕지거리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제 저녁 미팅 내용, 점심시간 전까지 보고서로 내!”
되도록 평온한 눈빛, 평온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았다. 왠지 생명이 연장된 느낌이다. 오전까지 완성하라고 한 보고서가 두 개인가 더 있었지만, 분명 부장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야동 사이트를 돌다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 뻔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미팅도 아니다. 저쪽 회사의 부장인가 하는 사람과 이쪽의 부장이 술집에서 의기투합해 코가 비뚤어지게 퍼마시고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어차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부장은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카라마츠는 잠시 부장이 이 회사의 내부 비밀을 모두 주절주절 불어 버렸다고-사장이 불륜중이지만 발기부전이라 젊은 애인을 만족시켜 주질 못한다던가-써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월급날까지는 아직 2주가 남아 있었고, 빚을 완전히 변제하려면 2년 이상 더 일해야 했다. 돈은 저쪽 회사에서 낸다고 해 비용 처리를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뭐 알아서들 하시겠지, 5만 엔 정도 나온 것 같은데.
돈이나 보고서 따위는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날 밤 짧지만 강한 해프닝이 있었다. 사람을 하루 종일 마음 복잡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일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나가는 가엾은 직장인일 뿐이다. 한때는 화려하고 매일이 두근거리는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봐, 마츠노 씨.”
옆자리 직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라마츠는 부장에게 보인 온화한 미소를 그대로 가져갔다. 대꾸는 굳이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멋대로 말을 꺼냈다.
“아~저번에 그거 말야, 시장분석, 내가 오후에 외근을 나가야 해서 완성을 못 할 것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상대의 도와달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안 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다 쓰라는 뜻이다. 외근이라니 어디 번화가에 놀러나가 여자 구경이나 하거나 애인을 불러다 드라이브나 가겠다는 거겠지. 카라마츠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고마워, 마츠노 씨, 하고 다시 뭔가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이 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장은 불륜을 저지르고 들킬 때마다 아내에게 납작 엎드려 빌며 아내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주었다. 옆자리 동료-동료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는 사장 아내의 조카였고 사장의 자숙 기간을 틈타 이 회사에 무사히 안착했다. 카라마츠가 빚을 다 갚을 때쯤이면 남자는 회사의 중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카라마츠가 써 준 보고서를 자신의 것으로 내밀어서. 그 때가 되어 무참히 쫓겨나지 않으려면 웃는 낯으로 그가 떠넘기는 일을 받아 들여야 했다.
이딴 회사, 정말로 불에나 타 버리라지. 그렇게 해서 내가 죽으면 얼마나 나올까. 장례식 비 정도는 나오려나. 그 정도로는 빚을 상환할 수 없겠지. 생각은 몽실몽실 커져갔다. 빚, 몇 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 그래도 제법 행복했던 학생 시절, 웃으며 했던 연극부 활동.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면이 잘 안 보이는 척 모니터 가까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신의 생각을 누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신체의 사소한 변화를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로 천천히 묻어가다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당신, 발성 좋은데.
어제 만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카라마츠는 그 남자와 키스했다.
첫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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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에 약한 체질이라 술은 되도록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몇 잔은 피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뻗는다. 응급실 신세를 졌던 적도 있다(물론 정시 출근했지만). 물론 부장은 술고래고, 거래처가 될 상대사의 부장이라는 사람도 만만찮은 술꾼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점원이 술을 몇 번이고 다시 나르고, 테이블 위가 먹다 흘린 안주로 더러워졌지만 그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뻗거나, 분노한 아내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화제는 어느 순간 카라마츠로 넘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이 안주거리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즐겁지 않았다. 이 녀석 아직까지 여자친구도 없답니다~ 그쪽에 예쁜 애 좀 있으면 좀 연결해 주세요, 아하하하 요즘 여자애들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죠! 걔들도 이거랑 이게 좀 되는 남자를 찾지! 첫 번째 ‘이거’는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으는 걸로 보아 돈, 두 번째 ‘이거’는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는 걸로 보아 뭔지 뻔하다. 삼십 년 가까이 동정으로 살아 온 카라마츠이지만,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여자들이 질겁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휴게실에서 여사원들이 험한 소리로 욕을 해 대던 걸 부장은 알까. 모르겠지만. 야, 들었냐, 마츠노? 너 어떻게 하냐 평생 동정으로 늙어 죽겠네! 부장이 낄낄 웃으며 카라마츠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신나게 두들겨댔다. 몸이 크게 흔들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등이 아렸다. 속에서 방금 전 마신 맥주가 올라올 것 같다. 카라마츠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부장이 아 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이, 마츠노, 그거 해 봐 그거.”
“네?”
“아 그거 있잖아, 너 특기. 혹시 아냐, 이케다 부장님께서 그 쪽 회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이 있다고 소문 내 주실지.”
그런 거라면 직접 하시죠. 카라마츠는 말을 삼키며 그저 웃었다. 분명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한 윗사람들 눈에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어떻게 보이거나 상관없다. 해야 하니까. 망할. 항상 이렇지.
“아 저 녀석, 학교 다닐 때 연극부였거든요~ 주연도 맡았었다나 뭐라나. 야, 너 저번에 했던 그거 한 번 보여드려.”
신입사원 시절, 눈에 잘 들기 위해 술자리에서 객기를 부렸던 이후로 부장은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카라마츠에게 연기를 시켰다. 이유는 뻔하다. 연극은 신데렐라, 그리고 각색을 해서 왕자가 신데렐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 구두를 신겨 준다. 처음 했을 때에는 대 호평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여직원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겨 주는 시늉을 했을 때에는. 그 이후로 계속 이 지경이었다. 신발만 여직원의 것이 아니라 구린내 나는 부장의 것으로 바뀌었을 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주세요.
“이야~ 뭐야, 연극부? 엄청 레어한데요. 좀 봅시다, 마츠노 씨.”
그래, 언제나 이런 전개지. 부장은 어디서 그런 사람만 골라와 미팅을 잡는지, 그 누구도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남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눈에 차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거지!”
부장이 몸을 밀어붙이는 기세에 밀려, 카라마츠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섰다. 두 술꾼이 한쪽은 호기심으로, 다른 한 쪽은 만족으로 가득 차 카라마츠를 바라보고 있다.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내일이 괴롭다.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고 며칠간 큰 소리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남자는 배를 쥐고 웃으며 연신 웃기죠? 웃기네 이 녀석!을 연발했다. 낄낄대는 부장의 발이 눈앞에서 흔들리며 거의 얼굴을 걷어찰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고 앉아도 모를 정도로 부장은 웃음에만 열중했다. 무어가 그리 자랑스러운 건지. 그래,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거 우리 회사 젊은 놈들에게 좀 보여 줘야겠네요, 카츠노 씨처럼 패기가 있어야지! 상대사 부장은 자기 회사 젊은 직원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젊은 직원들이 사라지는 이유도 카라마츠의 성을 틀리게 부른 것도. 카라마츠는 계속 웃기만 하며 술잔에 몰래 부을 물을 찾았다. 잔이 계속 차 있는 걸로 보여야 했다. 슬슬 먹먹해지는 시선이 테이블 위를 어지럽게 움직이다, 술집의 복도 끝으로 내달렸다.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 아니면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대부분 검거나 어두운 옷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온통 흰색으로 감싼 그의 차림은 이질적이었다. 옷과 맞춤한 흰색 모자 아래에서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꾸 노려보는 거지. 카라마츠는 모르는 척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의 주변에서 검은 옷의 거한 몇이 꿈질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얽히고 싶지 않다. 되도록 빨리, 무사히 이 영감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
가게 안쪽, 룸의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검은 옷의 남자들이 움직였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던 사람들은 거한들과 마주치자 금방 굳어 버렸다. 뭐지, 이 상황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엉망으로 편집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한들이 이제 막 나온 사람들을 다시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들 뒤를 따르며 흰 옷의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거한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보아 지시를 내릴 지위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방으로 밀어 넣으며 거한들도 벽 너머로 사라졌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하품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즐겁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뭔가 다른.
그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남자는 방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가게는 그저 사람들 소리로 부산할 뿐이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인간 몰이는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눈앞에는 술에 취해 신인 여배우에 대해 저속한 어휘로 평가를 내리는 중년의 남자 둘만 남았다. 여우에게 홀린 걸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어디 감히 반대하냐고(뭔지는 모르겠지만) 상사에게 머리를 맞았다.
아저씨들의 술 파티는 두 대의 택시에 한 쪽은 실려서, 다른 한 쪽은 비틀대는 발로 들어가 떠난 뒤에야 끝이 났다. 부장급 이상은 택시비를 지원해주지만, 카라마츠 같이 말단은 택시비조차 지원받지 못한다. 이곳을 지나는 막차는 카라마츠의 집까지 가지 않는다. 가다가 어딘가에서 내려 몇 십 분 정도 걸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부터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카라마츠는 눈에 보이는 아무 화단에 걸터앉았다. 속에서 액체와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걸으면 넘칠 정도로. 머리를 무언가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서늘한데 얼굴만이 끊임없이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어디더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려는데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세 번쯤 입력을 실패한 후에야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거한 두 사람이.
“아, 저, 무, 무슨 일이신가요?”
긴장으로 온 몸의 근육이 굳었다.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생각한 그대로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보스가 부르신다. 따라 와.”
보스고 뭐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놈의 보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큰길가로 통하는 길목 쪽에 검은 색의 커다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무심한 듯 끈질기게 차 쪽을 향했다. 거래처 직원 중 누군가의 드림 카라던 외제차였다.
“저, 저는 아무 짓도,”
대답은 통하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해 보이는 팔뚝이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들었다. 엉망인 몸은 너무 쉽게 차 쪽으로 끌려갔다. 그나마 머리채를 붙들려 아스팔트를 온통 쓸며 질질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라니. 어쩐지 속에서 뜨겁고 불쾌한 것이 울렁였다. 술에 취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뭐야, 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멋대로 일반 시민을 끌고 가는 거야.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지고 뜨거운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려 애를 썼다. 이거 놔, 경찰을 부를 거야, 너희들이 뭔데 나를 끌고 가, 빌어먹을 상사 놈, 빌어먹을 거래처 놈. 그놈들은 택시 타고 편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 왜 나는 길거리에서 야쿠자에게까지 위협을 당하고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다 이 시간까지 일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회사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이나 마시던 너희가 나빠! 하지만 카라마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깨를 붙든 손을 털어내며 알아서 걷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거한들이 의외로 순순히 몸을 놓아 주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새도 없이, 카라마츠는 그대로 밀려들어갔다. 이렇게 그 방에 사람들을 밀어 넣었던 건가, 몸이 심하게 흔들려 엉덩방아를 찧다시피 주저앉았다. 쓰러질 뻔하던 몸이 가벼운 충격과 함께 겨우 멈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올려다보았다.
“Buonasera!”
아까 그 흰색 남자였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알지 못하는 단어를 내뱉으며 남자가 팔을 벌렸다. 카라마츠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껌벅였다. 본능적으로 척추를 타고 한기가 오르내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외국인인가. 어딜 봐도 일본인, 그나마 다른 가능성을 연다면 한국인이나 중국인 정도로 보이는데. 어쩌면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일 수도 있지, 일본 선술집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도 그렇고.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남자가 쓴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차도 외국 차구나. 타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넓었던 건가.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눈만 굴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모자를 벗으며 남자가 히죽 웃었다. 드러난 덧니가 날카로워 보였다. 웃는 듯 훑어보는 시선처럼. 어쩐지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달라붙는 눈길이 끈질겼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만한 공간도 없었지만.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구, 굿 이브닝?”
남자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탈리아 어 모르나? 뭐, 상관없지. 내가 일본어로 하면 되니까.”
유창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본어였다. 뭐야, 그냥 일본인이었잖아. 괜히 놀리려고 한 건가.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카라마츠는 낡은 가방을 꼭 붙든 채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애를 쓰기는 했다. 남자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라마츠는 뒤로 꼼질꼼질 물러나며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녹음 어플리케이션이라도 켜 놓아야 하지 않을까. 손가락으로 액정화면을 긁으며 카라마츠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뭐, 뭡니까.”
“그 쪽에게 볼 일이 있어서.”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돈 문제인 걸까. 빚은 천지이지만 사금융에서 돈을 빌린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 장기를 떼이는 일은 없었던 게 다행이다. 나에게 돈이라니 어이도 없지. 꼬질꼬질한 회사원에게 무슨 돈을 뜯어내려는 건가. 저 머리에 대충 얹힌 모자만으로도 내 통장 잔고를 훌쩍 뛰어넘을 텐데. 글쎄 뭐, 내 장기를 팔면 저 모자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된 생각이 증발했다. 지금 느끼는 것이 긴장감인지 짜증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신, 목소리 좋던데.”
그나마 떠오르던 몇 가지 말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걸 봤다고? 지저분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사를 읊던 꼬락서니를 봤다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보았기를 바랐던 모습을 봤다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 퍼포먼스 한 번 더 보고 싶어. 보여 줘.”
“왜죠?”
“다시 보고 싶으니까.”
미친 놈 아니야, 카라마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집에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한다는 말이 겨우 연기 보여 달라는 건가.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자신이 무릎을 꿇을 때 마다 실실 웃는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저 짓을 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차라리 돈이라도 내던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입술을 다시 한 번 세게 깨물자 제멋대로 내달리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신은 달리는 차 안에 갇혀 있고 앞에는 덩치가 둘이나 있다. 이 남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덩치들이 보스로 모시며 턱짓 하나에 움직이고 있다면 분명 야쿠자나 그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선택권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나갈 수는 더더욱 없고 나간다 해도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이 외국인인지 뭔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 나았다. 거절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보고 나면, 보내 줄 겁니까?”
“물론.”
그래,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할까. 부장보다는 낫겠지. 이 남자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칸막이는 단단하게 닫혀 있어 사실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기는 무대다. 진짜 무대에는 단 한 번도 올라서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대다. 눈을 뜨자 살짝 넓은 차 안이 좀 더 넓은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 중 하나다. 카라마츠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대사가 끝났다. 깊은 숨과 함께 카라마츠는 이상입니다, 하고 중얼대며 시트에 앉았다.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은 채로 끊임없이 카라마츠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스쳐지나갈 때 보다 더욱 사람을 납치해서까지 보여 달라고 졸라댈 때는 언제고, 막상 보니 실망한 건가. 그런 거면 차라리 그냥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저, 다 끝났는데요….”
남자가 퍼뜩 놀라며 눈을 크게 깜박였다.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설마 얼굴 뻘개질 정도로 화가 났나? 아, 그냥 아까 저 덩치들이 말을 걸었을 때 바로 도망갈걸 그랬어. 이 남자라면 카라마츠 같은 소시민 하나는 사회에서 쉽게 지울 수 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의 안전은 이 좁은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부장의 고함소리는 차라리 훨씬 더 논리적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남의 생명을 얼마든지 망가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의 명줄을 손에 쥐고 있다. 고작 연기 한 씬을 가지고.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내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 꽉 붙들어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술기운이 날아갔다.
“Bravo!”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손뼉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남자의 표정은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옷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낸 아이의 얼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심장을 콕콕 찔렀다. 의외네, 야쿠자인지 뭔지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뭐야, 아까보다 더 잘 하잖아. 굉장히 마음에 들어. 목소리도, 발성도, 표정도, 연기도,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좋은데.”
“가, 감사합니다…?”
“그 부분이 좋아. 주방에서 나온 신데렐라에게 말을 걸 때. 이 사람인가, 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눈빛이. 왕자가 확실히 신데렐라에게 반해 있고 그녀를 기억한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어. signore, 당신 대단한 걸.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없는데. 특히 목소리. 연기하는 톤도 그냥 말할 때도 모두 듣기 좋아. 깨끗하고 명확해.”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였다. 학생 때에는 그저 외우기에 급급했고, 술자리에서 수십 번을 되풀이 할 때에는 웃음만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울컥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사람이란 단순하구나. 그렇게 들끓어 오르던 생각이 말 한 마디에 풀어지니.
“감사의 뜻으로 집에 모셔다 드리지, signore. 집이 어디야?”
“아카츠카 구, 나카무라쵸….”
“어이, 들었지? 여기서 별로 안 멀군. 그 쪽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곧 이어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이 차가 아직 움직이지 조차 않았다는 걸 알았다. 생각이 널을 뛰어 차가 움직이는 것조차 몰랐다니, 정말 우습지도 않다. 어쩌면 당장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창밖의 풍경이 뒤로 달아나며 달각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갈 수 없다. 상황은 다 끝났는데도.
그래도 거한들에게 붙들려 차에 탈 때 보다는 조금 나았다. 적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꽤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몸이 서서히 나른해졌다. 아, 다행이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어서.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이불 속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 어차피 서너 시간 밖에 못 자겠지만.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카라마츠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옆에서 몇 번인가 가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 복권에라도 맞지 않는 한 이런 차는 탈 수 없겠지. 탄 김에 찬찬히 기억해 두자. 스스로 생각해도 촌스러운 짓이었지만 어차피 이 남자와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이 차, 마음에 들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펄쩍 뛰며 가방을 끌어안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자가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귀 옆에서 나른하게 울렸다. 온 몸으로 소름이 퍼져나갔다.
“마, 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제 차도 아니고.”
“가지고 싶어?”
“됐습니다.”
“헤에, 뭐야. 농담이라고, 놀랄 필요 없어. 하지만 그런 연기력이었다면 진즉 스타가 되어서 이런 차 정도는 그냥 끌고 다녔을 텐데. 성우라도 할 수 있었을 걸. 연극부였다고 했지?”
“그 새 들었군요….”
“함께 있던 그 뚱땡이가 그렇게 크게 말하는데 못 들을 리가 있나. 그런데 그 자식 못 쓰겠더라, 젠장. 보기만 하는데도 발 냄새가 다 올라오는 것 같더라니. 다리에 털도 있고. signore의 연기력은 그런 녀석 신발이나 신겨 주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니까요.”
집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늘 전철에서 바라보는 거리지만 정작 그 속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으려니 어색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저 쪽에 있는 건물을 보아하니 나카노 역 근처인가. 빨리 도착하면 좋을 텐데. 남자의 손이 목을 둘러 어깨를 쥐었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전에 몸에 소름을 넘어 한기가 올라왔다. 뭐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야. 외국에서는 다 이런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감싸 잡고 그러나?
“뚱땡이 같은 건 됐어. 저런 놈의 면상에 샷 건을 갈길 수도 없다니 회사원 생활도 장난이 아니군. 어쨌거나 그 정도면 스카우트도 받았을 것 같은데. 잘 안 됐나 봐?”
“아뇨, 저 무대 올라간 적 없습니다.”
“엑, 거짓말! 어째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극부였지만 무대에 제대로 오른 적이 없었다. 1학년 때에는 무대도구를 만들거나 무대 뒤에서 보조를 했고, 2학년 때에는 말 한 마디 없이 뒤를 지나가는 단역으로 끝이었다. 3학년 때에 가서는 부원 사이의 이지메와 성추행 문제에 휘말려 여자 부원 일부와 남자 부원 대다수가 나가 버렸다. 폐부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남은 사람들끼리 꾸려가자고 선택한 것이 신데렐라였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여성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왕자 역할은 자동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3학년 남자부원인 카라마츠의 차지가 되었다.
3학년이었고,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연극이었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필사적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탈퇴 부원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신경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학교 축제는 시작도 하기 전 화학부에서 화재를 일으켜 중지되었다. 강당은 무사했지만 학생 하나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실려 갔으니 중지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 달에 한 번 이상 술자리에서 지겹게 아저씨의 신발을 신겨 주고 있으니, 뭐 어떻게든 무대에는 오른 셈인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며 웃거나 가엾어 하기만 했을 뿐 사정은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았자면 다른 의미로 매일 언급되었을 테니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자신은 긴장한 건가 마음이 풀어지고 있는 건가.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어대다니.
“아깝네. 정말로.”
“그렇죠. 뭐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어깨에 있던 손이 목 뒤로 옮겨왔다. 맨살에 조금 차가운 손이 닿으니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목을 누르는 힘에 남자의 얼굴 쪽으로 끌려갔다. 가깝다. 너무나 가깝다. 나른한 듯 일렁이며 빛나는 눈이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다. 향수 냄새가 짙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숨소리가 다가온다. 뒤로 물러나 보았지만 몸이 붙들린 이상 별 소용이 없다. 코끝이 닿을 것 같다. 외국인이라도, 이렇게는 안 할 거야!
“좋아, 음, 뭐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아니지 오히려 괜찮네, 무대에 정말로 올라가서 명성을 얻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귀찮았겠군. 이렇게 별빛처럼 빛나는 사람이 정말 하늘에 떠 있었다면 잡기 힘들겠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그대로. 목을 누르던 손에 힘이 더해진다. 숨결이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아니 코가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향수 냄새가, 아니 잘 모르는 담배 냄새가 아직 남아 있던 알코올과 섞여 뇌를 어지럽힌다. 남자의 눈빛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마치 무언가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입술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이상하게 우그러지는 비명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남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퉁퉁 두들겼지만 다른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야쿠자는 야쿠자인가, 남자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악스러웠다. 입술이 몇 번인가 부딪혔다가, 곧이어 입 속으로 살덩어리가 들어왔다. 온 몸에 경보가 울렸다. 소름보다 더 대단한 느낌에 온 몸이 굳었다. 이건, 뭐야, 이건, 아니잖아. 나는 그냥, 그냥 끌려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런데 마음대로 어깨에 손을 얹고, 목덜미를 만지고, 키스를 하고, 심지어 첫 키스인데, 남자의 혀가 자신의 것을 꾹 눌렀다. 타액이 섞였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오만가지 감정과 알코올과 남자의 체취가 얽혀 정신이 아득해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남자의 옷깃을 꾹 쥐었다. 몸이 뜨거워지는 건지 숨을 못 쉬어 죽어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남자가 물러섰다. 할딱대며 숨을 고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뭐야, 키스는 익숙하지 않은 건가?”
뭔 소리인지 해석조차 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상황을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생각은 헛돌기만 할 뿐 제대로 가닥이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추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아쉽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카라마츠도 멍하니 반대편 창 바깥을 훑었다. 아는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집이다. 아, 그래, 집이지. 다 왔구나. 이제 언제든 내리기만 하면 되는구나. 문이 달각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배실배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남자의 풀어진 얼굴과, 방금 전 입술을 닦아낸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군. 그렇지만 나는 이 만남을 한 번으ㄹ커헉?!”
시트 위로 배를 부여잡고 거꾸러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카라마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괜찮은 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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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고함과 타자 소리와 쓸데없는 웃음소리를 들은 귀가 멍멍했다. 눈이 시큰거려 더 이상 모니터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제 곧 막차 시간이다. 지금 가지 않으면 회사에서 자거나 키보드와 씨름해야 한다. 카라마츠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자신과 다른 직원들은 사흘간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사건의 원흉들은 정시퇴근 했다. 그래도 이틀간 전화를 돌리고, 보고서를 새로 만들고, 격렬하게 회의를 거치며 온 회사를 여기저기 휘젓고 돌아다닌 끝에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나머지는 어차피 지금 할 수 없으니 아침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녹초가 된 다른 부서 사람들이 책상 위에서 졸거나 일을 하고 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흐릿하게 인사를 하니 답례가 흐릿하게 되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것 같았는데 벌써 1층이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 정문은 이미 잠겨 있었고, 쪽문 옆 경비실 수위 아저씨가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카라마츠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다. 그리고 당장에 후회했다. 아, 그냥 하루 더 회사에 있을 걸.
화려한 외제차가 회사 앞 도로변에 서 있었다. 주차 구역은 깨끗하게 무시한 채. 딱지니 견인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차에 기대어 있던 흰 옷에 흰 모자를 쓴 중키의 남자가, 카라마츠를 발견하자 히죽 웃으며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희미하게 담배 연기가 허공에 퍼져나갔다. 사흘이나 철야를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Buonasera, 마츠노 카라마츠 씨.”
잠이 달아났다.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여기에서 도망가야 할까.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수백 가지의 의문이 머릿속에서 터져나가며 마음에 먹칠을 했다. 피곤과 경악에 절어버린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는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드럼통에 시멘트와 함께 묻힌다. 장기가 모조리 뜯겨나가 팔린다.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소리가 갈려 나왔다.
“여긴, 어, 어떻게.”
“명함.”
명함?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잠시 몸이 얽혔을 때 가방이 떨어지고 명함이 흩어졌고…. 그 때 슬쩍한 모양이었다. 야쿠자쯤 되면 손도 재빨라야 하는 모양이다.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카라마츠의 앞에 섰다. 그 날 차 안에서 맡았던 담배 냄새가 숨통을 막았다. 설마 머리채든 어디든 잡고 끌고 가려는 걸까.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도망갈 수 없다. 카라마츠는 발끝만 바라보며 남자의 사형 선고를 기다렸다.
“사흘간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손은 대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카라마츠를 뚫어 버릴 듯이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생각보다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배를 호되게 걷어찬 녀석을 바라보는 것 치고는. 의외였다. 이런 쪽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 한 덩어리보다 자신의 피해 한 톨이 더 크게 보일 줄 알았는데.
“…처, 철야였습니다만.”
“철야? 밤새는 거? 회사에서? 그래도 그렇지 사흘 동안이나? 일본의 회사들은 대부분 이렇게 며칠씩 사람을 잡아 두나?”
“회사마다 다르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카라마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엉뚱한 걸 궁금해 하는 거지. 키스 했다가 한 대 얻어맞았으니 화가 나 족치러 오는 건 이해가 가지만, 보통 그런 상대의 사생활까지 물어보나? 차라리 지금 너의 장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물어보는 쪽이 어울릴 텐데.
“이틀간 기다렸는데 회사에서는 나오지도 않고, 설마 앓아누웠나 했더니 밤이 되어도 집에 불이 켜지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은 전화를 걸어볼까 했는데 내내 전원도 꺼져 있고, 회사 전화는 퇴근 시간 까지 통화 중이고. 뭐야, 이거. 일본인은 부지런하다고는 들었지만 이건 부지런이 아니라 사람을 레몬 즙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잖아.”
아, 맞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 전화 할 사람도 없고, 스마트폰이지만 뭘 들여다 볼 시간도 없다. 기껏해야 알람 기능 정도가 필요하지만 회사 전화라니, 사흘간은 콜센터나 다름없었으니 내내 통화중이었겠지.
남자가 손을 슥 들었다. 아, 이번에는 진짜 잡힌다. 끌려간다.
뺨에 살짝 서늘한 손이 닿았다. 광대뼈를 몇 번인가 쓸던 손이 눈 아래 연약한 살을 만지작댔다. 간지럽다. 기분이 이상하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눈길을 이해할 수 없다. 뭐지, 이건 또 뭐야?
“당신 얼굴도 목소리도 아주 엉망이야. 젠장, 이 아까운 걸 이렇게….”
귓불에 손가락이 스친다. 소름이 돋는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이번에는 주먹이었다.
“커흐억!”
남자가 바닥에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명치를 감싸 쥔 채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는 모습을 보고서야 카라마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또 저질렀다. 이제는 진짜 죽는다. 이 자리에서 도륙당하고 말 것이다. 장기 적출이고 드럼통이고 뭐고 기계에 내던져져 뼈조차 남지 않고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에게 끌려가 억지로 보아야 했던 고어 영화의 고문 살해 장면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그게 누구였더라, 부장이었던가 옆 부서 차장이었던가. 그리고는 술을 물이라며 속여 마시게 하고, 다섯 번인가 신발을 신기게 하고. 그 다음 날에는 숙취에 절어 늦잠을 잔 주제에 감기에 걸렸다며 일을 모조리 떠넘기고는 이틀간 안 나오고. 안 좋은 기억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장은 조롱하거나 화만 내고, 옆에서는 일을 밀어놓거나 무시하고, 돈 때문에 도망갈 수조차 없고, 요즘도 그래, 사흘간 남의 뒤처리를 하고, 이름조차 남자에게는 사흘간 두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 이게 다 뭐야?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빚 때문에 이딴 회사라도 다녀야 하는 게 잘못이야? 이런 곳에서라도 열심히 일 해서 사회에 폐 끼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게 잘못이야? 만나는 사람들마다 왜 나를 제멋대로 굴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 그렇게 웃겨? 사람이 그렇게 우스워?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사람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그저 못 본 척 하면 끝이야? 빚을 다 갚지 못해 감방에 끌려가거나, 회사에서 숨이 막혀 죽거나, 야쿠자에게 끌려가 산 채로 정육 기계에 내던져지거나, 어차피 똑같다. 어차피 죽는다.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는데! 주먹 한 방으로 날아가지 않은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부글대다, 다시 터졌다.
“웃기지 마, 이 성추행범, 도둑, 스토커!”
기침을 내뱉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젠장,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은 아니지만 너 때문이야! 갈 곳 없는 마음이 눈앞의 남자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이 남자가 이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갔다. 생각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고함을 지르는 목구멍 안쪽에서 단내가 났다.
“네가 뭔데 나를 마음대로 만져? 사람 억지로 끌고 와서 광대 짓이나 하라고 강요하고, 그래서 내가 당신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줬다고 멋대로 만져도 된다는 거야? 그 쪽이 뭐 하는 족속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만지작댈 권리는 없어! 또 만지러 온 거면 꺼져!”
“꺼지라고오?”
남자가 훅 일어섰다. 갑자기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크게 숨을 뱉었다. 바닥을 구르던 꼴사나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보이는 것은 서늘한 눈길뿐이었다. 눈빛이 날카롭다. 베일 것 같다.
“권리?”
척추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었다.
“너한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딴 회사에서 찌들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주제에, 너에게 무언가를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너는 어차피 밑바닥인데. 밑바닥이면 밑바닥답게 주제 파악하지 그래? 겨우 붙들고 있는 그 목숨이나마 지키려면.”
낮게, 나른하게, 달짝지근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뇌에 스며들었다.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것처럼. 머리를 짓누른다. 몸이 한없이 작아진다.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 비해 그저 하찮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말단의 말단 인생일 뿐이고. 그러니까,
아냐!
나는, 사람이야!
힘을 실어 날린 주먹은 어이없이 허공에 붙들렸다. 힘이 장난이 아니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 두어 번 용을 써 보았지만 남자의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남자가 호오, 이제 좀 살아났네, 하고 중얼대는 말이 더욱 거슬렸다. 온 몸에 까슬까슬한 것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카라마츠는 거칠게 주먹을 털어냈다. 상대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카라마츠의 주먹을 밀어낸 남자가 킬킬 웃었다. 몸 전체를 베어내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후우, 당신, 정말로 제대로 때리는 방법은 잘 모르나 보군. 저번에도 방금 전에도 기습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달라. 눈에 다 보인다고. 새끼고양이가 허공에 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데. 맞아줄 걸 그랬나, 얼마나 아픈가 보게.”
“그러면 그냥 맞지 그랬습니까?”
한 번 울컥한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뭐지, 이 녀석은. 제멋대로 사람을 만지작대다 살벌하게 굴다 다시 장난을 치다가. 야쿠자라는 족속은 다 이런가? 아니면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간 보려고 놀렸던 건가? 이 남자에게 아양 떨 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드럼통에 담겨 바다에 빠진대도.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니 남자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식은 뭐 저렇게 실실 웃고 난리야 사람보고.
“미안, 놀릴 생각은 없었어. 내가 좀 과했군. 좀 더 친해지고 서로의 마음이 좀 더 통한 다음에 스킨십을 했어야 했는데, 당신 목소리가 꼭 막 짜낸 꿀 같아서. 이런 달콤한 목소리가 묻어나오는 입술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그만 실수해 버렸어.”
“여러 가지로 굉장하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렇고.”
“정말이야, 사흘 동안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다시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고. 연락도 되지 않아서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결국 스토커 같은 짓까지 해 버렸군. 정말로 미안해. 그 때도 이번도 명백히 내 잘못이야. 사과의 뜻으로 집까지 데려다 주지. 어때? 시간도 많이 늦었고, 피곤해 보이는데. 당신 목소리, 정말 꽉 잠겼어. 그 목소리조차도 듣기 좋지만.”
“왜요? 설마 또 차 안에서 성추행하려는 겁니까?”
“아니야. 맹세하지, 이번에는 얌전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내가 데려다 주고 싶어서 그래. 부하들도 오늘은 없어. 우리 둘이서만 짧은 드라이브를 즐기면 돼.”
“그거 참 편하네요.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요구하면 되다니.”
뾰족하게 내지르는 말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민다. 뭡니까, 하고 바라보는 눈길에 남자가 당연히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나? 하고 되물어 왔다. 보통 이런 일은 여자에게 하지 않던가. 뭐 동성 커플도 시부야에 가면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성별은 중요하지 않지만, 이 남자 정도라면 적어도 좀 더 어리고 잘생긴 남자애를 고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피곤에 찌든 말단 회사원에게 옆자리에 같이 타 달라고 청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거절하기조차 귀찮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차에 타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고, 어차피 이 남자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막차는 끊겼다. 자신을 두 번이나 성추행하려 든 남자의 차에 타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믿어 주어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걷기 너무나 힘들었다. 왠지 왼쪽 발목이 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걷어찬 건 사흘 전의 일인데. 내가 정말 미쳤구나, 피곤하다고 성추행범 차를 냉큼 올라타고.
“알았어요. 탈게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냉큼 조수석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가 자리에 몸을 파묻은 뒤에는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워주기까지 했다. 문까지 손수 닫은 남자가 종종 뛰어 운전석에 앉았다. 어제는 덩치 큰 운전사들이 정중하게 모시던 사람이 말이지. 이제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 남의 일 같았다. 알긴 알아, 이거 드라마에서 봤지. 꼭 신데렐라 스토리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자주 봤었어.
나는 신데렐라는 아니지만.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가 시큰했다. 눈을 뜨니 시야가 이상하게 흐려져서 다시 감았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버스보다 훨씬 나직하다. 좋은 차는 다르구나, 사흘 전의 그 차도 그랬는데.
“그런데요.”
“뭐지, gattino?”
이상한 단어가 끼어들어간 것 같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을 했어요? 내 목소리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당신을 두 번이나 때린 사람에게 화도 안 날 정도로. 사실 아까 날 기다리는 당신을 봤을 땐 나를 드럼통에 집어넣거나 다진 고기로 만들 줄 알았거든요…. 그것도 운명의 데스티니겠지만.”
“운명의 데스티니라니, gattino도 참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래, 하루 종일 듣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지만 gattino의 매력은 목소리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당신 연기를 보았을 때에도 입술을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좋았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당신도 굉장히 사랑스러워.”
“…당신 머리 괜찮아요?”
“물론.”
“지금 그거, 꼭 당신이 저에게 반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당신이 생각한 그대로가 맞아.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흘간 얼마나 괴롭던지. 당신만 생각이 나서 도저히 떨어낼 수가 없었다고. 건물에서 나오는 당신 얼굴 보니까 내가 다 아팠는걸. 거의 죽을 사람처럼 되어선. 계속 만지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체온을 나누고 싶고,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카라마츠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성추행범의 차에 앉아서 들을 말로 적당한가? 차라리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에서 일어난 일은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흘려보내면 되니까. 얼굴이 뜨겁다. 이 상황을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적어도 하룻밤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전 남자인데요. 시부야에서는 동성 결혼이 가능하지만.”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난 당신 이름도 몰라요.”
“이치마츠라고 불러. 당신 이름은 아니까 됐고.”
“당신이 뭐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마피아.”
잠이 확 달아났다. 카라마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안전벨트에 짓눌려 다시 시트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