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그 일에 얽혀 있는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엮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완전한 우연이란 없다. 결과는 우연으로 보일지라도, 모두 인간의 의지나 행동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 날, 내가 그 호텔에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괴도 블루가 그 날 호텔에서 열리는 행사를 노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나도 그도 모두 스스로의 의지로 그 곳에 존재했다.] <푸른 그림자를 뒤쫓다> 1편 첫 부분이군. 그래, 조회수가 얼마나 나온 거지? 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1973만. 곧 2천만이 넘는댔어.”
“일본 인구가 1억, 그 중 2천만이 보다니. Brilliant! Congratulation! 팬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읽었어?”
“Of course! 나와의 조우를 블로그에 올렸을 때부터. 댓글도 꽤 열심히 달았는데, 못 보았나 보지? 아,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따위는 넣어 둬. 소송에 걸릴 일은 없을 거야. 그래, 물론 다른 이들의 경험담도 보았지. 블로그, SNS 뿐만 아니라 신문도 잡지도 유튜브도 TV 방송도. 하지만 그대의 경험담은 차원이 달랐다. 문체가 정돈되어 있고, 냉정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듯 해도 열정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달콤하고, 순수함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어.”
“관심종자야? 자기 목격담을 다 찾아보고 있게?”
“세상에 정의의 빛을 뿌렸다면 그 빛이 어디까지 닿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지지 않나? 나에 대해 쓴 책은 다 읽어보았지. 그 중에서 그대의 책이 단연 최고였어. 물론 나라는 소재도 충분히 좋았지만, 나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글이야. 자네의 이전 작들도 읽어 보았어. 고양이 탐정 시리즈이던가? 정말 재미있던데. 그것도 최근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면서? 대단하군. 그대의 재능은 정말 뛰어나.”
“훔친 건 아니지?”
“Non, non. 그런 서운한 말은 그만 둬. 훌륭한 책에는 경의를 표해야지, 제 값을 치르고 사는 걸로. 이걸로 답이 되었나? 그렇다면 베스트셀러 작가, 이번에는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차례인 것 같은데.”
검은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벽을 훑었다. 그 아래에서 신문지가 바슥대며 움직이고 인쇄용지가 빠득대고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미끄러졌다. 크게 인쇄된 글자마다 괴도 블루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사진은 모두 구도와 장소가 달랐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만큼은 같았다. 파란색 스팽글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검은 실크햇, 같은 파란빛의 안감으로 빛나는 검은색의 망토, 어깨에 흐트러짐 없이 달린 타조 깃털 수십 장, 몸에 잘 맞는 검은 슈트와 파란색 셔츠, 그리고 장식으로 푸른색 코사지. 얼굴은 항상 흔들리거나 멀리서 찍혀 명확하지 않았지만,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만은 똑똑하게 보였다.
사진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모습의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등 뒤에는 벽의 3분의 1 정도를 꽉 채우고 있는 커다란 포스터가 있었다. 풍선 수십 개와 작은 크기의 애드벌룬 두어 개에 매달려 보름달을 향해 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손만 뻗으면 당장 사진을 끌어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굵은 눈썹이 꾸물거렸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이 파랗게 빛났다.
“어째서 이 방에…. 나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모여 있는 거지?”
사면이 종이와 사진으로 가득 찬 서재의 한가운데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는 올바른 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경시청에 외부 전문가 자격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모두 괴도 블루가 일으키는 절도 혹은 절도 미수 사건이었다. 괴도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으니까. 답을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답을 알면서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까? 밀리언셀러 작가 마츠노 이치마츠는 다시 한 번 방 안과, 벽에 붙은 신문기사와, 사진과, 사진에 기대어 선 괴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일까?”
***
그 날 이치마츠가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의지였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이치마츠가 속한 작은 삼류(아니, 십류 쯤 될 것이다) 출판사에서 간판 작가의 증쇄(수상도 아니고, 증쇄)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간판 작가님께서는 오지 않는 작가의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뉘앙스로 초청장을 돌렸고 담당자의 통곡에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가야 했다. 파티는 삼류 출판사답지 않게 호텔에서 열렸는데, 아마 증쇄로 벌게 될 돈의 10% 정도는 여기서 다 해 먹을 거라고 이치마츠는 예상했다.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 구석에서 뷔페 음식을 야금야금 싸놓고 있던 이치마츠의 눈에, 묘한 게 눈에 띄었다.
그 때 그냥 모른 척 했어야 했는데.
왜 따라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 보니 호텔 본관 뒤편의 작은 정원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추위에 강한 몇몇 종들은 닳아빠진 푸른색으로나마 버티고 있었고 무엇보다 군데군데 꽃을 품고 선 매화나무는 볼 만 했다. 건너편의 별채에서도 무언가 파티가 벌어지는 듯 시끄러웠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삼류 출판사 간판작가라며 거들먹거리는 녀석, 그 옆에서 아양 떠는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 여기 왜 왔지, 자리를 비웠다고 난리난리 치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
그리고 웬 남자와 마주쳤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그 남자와.
어둠과 어둠을 뚫고 흐트러지는 벌건 빛 속에서 그만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실크햇의 장식이나 가볍게 흔들리는 망토의 안감은, 햇살 아래에서라면 분명 과해 보였겠지만 어둠 아래에서 보니 제법 영롱한 파란색이었다. 평소에 쉽게 입을 만한 옷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걸 입혀놓고 있자니 왠지 잘 만들어진 조각상 같기도 했다. 이유는 몰라도 시선을 뗄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훑어보는 사이 상대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깜짝이야. 사람인가? 사람이야? 사람이 저런 옷을 입고 다닌다고? 가장 무도회인가? 가장 무도회라도 저딴 식으로는 안 입겠다! 솔직히 저거 너무 반짝인다고! 저딴 천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 거람? 이치마츠는 멍하니 알지도 못하는 원단 가게 사장을 욕하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저 안대. 아까 지나가던 호텔 고용인이 하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분명 해적 복장을 하고 있었지, 이 호텔 어디에서 그런 이벤트를 하나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왔고….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눈이 빙긋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그의 옷에 매달려 쉴 새 없이 번쩍이는 파란색과 비슷해 보였다. 감정은 알 수 없지만 눈도 뗄 수 없는 그런 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나를 찾아내다니. 그대는 어디에서 나타난 재야의 고수이신지?”
그제야 이치마츠는 묘하게 이 호텔에 사람이 적은 것, 하지만 여기저기 경찰이 서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래서였구나! 바보같이, 왜 그런 걸 몰랐지? 편집부 멍청이들은 왜 이런 날 이 호텔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한 거야? 그야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랬겠지!
괴도가 물건을 훔쳐가겠다고 예고를 날린 호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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