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5. 01:39

이치카라 AU/ 돈이치x히라카라(돈히라)

1편 / 2편 / 3편


*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용도로 일정분량 완성할 때마다 올립니다.

* 이 글은 퇴고를 거쳐 카라른 온리에 동인지로 낼 예정입니다.

* 그래서 아마 중반부까지만 연재하고 나머지 미공개분은 동인지로 확인해주세요ㅠㅠ 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알코올에 약한 체질이라 술은 되도록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몇 잔은 피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뻗는다. 응급실 신세를 졌던 적도 있다(물론 정시 출근했지만). 물론 부장은 술고래고, 거래처가 될 상대사의 부장이라는 사람도 만만찮은 술꾼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점원이 술을 몇 번이고 다시 나르고, 테이블 위가 먹다 흘린 안주로 더러워졌지만 그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뻗거나, 분노한 아내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화제는 어느 순간 카라마츠로 넘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이 안주거리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즐겁지 않았다. 이 녀석 아직까지 여자친구도 없답니다~ 그쪽에 예쁜 애 좀 있으면 좀 연결해 주세요, 아하하하 요즘 여자애들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죠! 걔들도 이거랑 이게 좀 되는 남자를 찾지! 첫 번째 ‘이거’는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으는 걸로 보아 돈, 두 번째 ‘이거’는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는 걸로 보아 뭔지 뻔하다. 삼십 년 가까이 동정으로 살아 온 카라마츠이지만,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여자들이 질겁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휴게실에서 여사원들이 험한 소리로 욕을 해 대던 걸 부장은 알까. 모르겠지만. 야, 들었냐, 마츠노? 너 어떻게 하냐 평생 동정으로 늙어 죽겠네! 부장이 낄낄 웃으며 카라마츠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신나게 두들겨댔다. 몸이 크게 흔들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등이 아렸다. 속에서 방금 전 마신 맥주가 올라올 것 같다. 카라마츠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부장이 아 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이, 마츠노, 그거 해 봐 그거.”

 “네?”

 “아 그거 있잖아, 너 특기. 혹시 아냐, 이케다 부장님께서 그 쪽 회사에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이 있다고 소문 내 주실지.”


 그런 거라면 직접 하시죠. 카라마츠는 말을 삼키며 그저 웃었다. 분명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한 윗사람들 눈에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어떻게 보이거나 상관없다. 해야 하니까. 망할. 항상 이렇지.


 “아 저 녀석, 학교 다닐 때 연극부였거든요~ 주연도 맡았었다나 뭐라나. 야, 너 저번에 했던 그거 한 번 보여드려.”


 신입사원 시절, 눈에 잘 들기 위해 술자리에서 객기를 부렸던 이후로 부장은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카라마츠에게 연기를 시켰다. 이유는 뻔하다. 연극은 신데렐라, 그리고 각색을 해서 왕자가 신데렐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 구두를 신겨 준다. 처음 했을 때에는 대 호평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여직원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겨 주는 시늉을 했을 때에는. 그 이후로 계속 이 지경이었다. 신발만 여직원의 것이 아니라 구린내 나는 부장의 것으로 바뀌었을 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주세요.


 “이야~ 뭐야, 연극부? 엄청 레어한데요. 좀 봅시다, 마츠노 씨.”


 그래, 언제나 이런 전개지. 부장은 어디서 그런 사람만 골라와 미팅을 잡는지, 그 누구도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남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눈에 차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거지!”


 부장이 몸을 밀어붙이는 기세에 밀려, 카라마츠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섰다. 두 술꾼이 한쪽은 호기심으로, 다른 한 쪽은 만족으로 가득 차 카라마츠를 바라보고 있다.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내일이 괴롭다. 자신을 부끄럽게 했다고 며칠간 큰 소리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남자는 배를 쥐고 웃으며 연신 웃기죠? 웃기네 이 녀석!을 연발했다. 낄낄대는 부장의 발이 눈앞에서 흔들리며 거의 얼굴을 걷어찰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고 앉아도 모를 정도로 부장은 웃음에만 열중했다. 무어가 그리 자랑스러운 건지. 그래,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거 우리 회사 젊은 놈들에게 좀 보여 줘야겠네요, 카츠노 씨처럼 패기가 있어야지! 상대사 부장은 자기 회사 젊은 직원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젊은 직원들이 사라지는 이유도 카라마츠의 성을 틀리게 부른 것도. 카라마츠는 계속 웃기만 하며 술잔에 몰래 부을 물을 찾았다. 잔이 계속 차 있는 걸로 보여야 했다. 슬슬 먹먹해지는 시선이 테이블 위를 어지럽게 움직이다, 술집의 복도 끝으로 내달렸다.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 아니면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대부분 검거나 어두운 옷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온통 흰색으로 감싼 그의 차림은 이질적이었다. 옷과 맞춤한 흰색 모자 아래에서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꾸 노려보는 거지. 카라마츠는 모르는 척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의 주변에서 검은 옷의 거한 몇이 꿈질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얽히고 싶지 않다. 되도록 빨리, 무사히 이 영감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 

 가게 안쪽, 룸의 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검은 옷의 남자들이 움직였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던 사람들은 거한들과 마주치자 금방 굳어 버렸다. 뭐지, 이 상황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엉망으로 편집한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한들이 이제 막 나온 사람들을 다시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들 뒤를 따르며 흰 옷의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거한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보아 지시를 내릴 지위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방으로 밀어 넣으며 거한들도 벽 너머로 사라졌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하품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즐겁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그리고, 뭔가 다른.

 그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남자는 방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가게는 그저 사람들 소리로 부산할 뿐이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인간 몰이는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 눈앞에는 술에 취해 신인 여배우에 대해 저속한 어휘로 평가를 내리는 중년의 남자 둘만 남았다. 여우에게 홀린 걸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어디 감히 반대하냐고(뭔지는 모르겠지만) 상사에게 머리를 맞았다.







 아저씨들의 술 파티는 두 대의 택시에 한 쪽은 실려서, 다른 한 쪽은 비틀대는 발로 들어가 떠난 뒤에야 끝이 났다. 부장급 이상은 택시비를 지원해주지만, 카라마츠 같이 말단은 택시비조차 지원받지 못한다. 이곳을 지나는 막차는 카라마츠의 집까지 가지 않는다. 가다가 어딘가에서 내려 몇 십 분 정도 걸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부터 그냥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카라마츠는 눈에 보이는 아무 화단에 걸터앉았다. 속에서 액체와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걸으면 넘칠 정도로. 머리를 무언가 꾹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서늘한데 얼굴만이 끊임없이 달아오른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어디더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려는데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세 번쯤 입력을 실패한 후에야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거한 두 사람이.


 “아, 저, 무, 무슨 일이신가요?”


 긴장으로 온 몸의 근육이 굳었다.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생각한 그대로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보스가 부르신다. 따라 와.”


 보스고 뭐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놈의 보스가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큰길가로 통하는 길목 쪽에 검은 색의 커다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무심한 듯 끈질기게 차 쪽을 향했다. 거래처 직원 중 누군가의 드림 카라던 외제차였다.


 “저, 저는 아무 짓도,”


 대답은 통하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해 보이는 팔뚝이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들었다. 엉망인 몸은 너무 쉽게 차 쪽으로 끌려갔다. 그나마 머리채를 붙들려 아스팔트를 온통 쓸며 질질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라니. 어쩐지 속에서 뜨겁고 불쾌한 것이 울렁였다. 술에 취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뭐야, 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멋대로 일반 시민을 끌고 가는 거야.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지고 뜨거운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려 애를 썼다. 이거 놔, 경찰을 부를 거야, 너희들이 뭔데 나를 끌고 가, 빌어먹을 상사 놈, 빌어먹을 거래처 놈. 그놈들은 택시 타고 편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 왜 나는 길거리에서 야쿠자에게까지 위협을 당하고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다 이 시간까지 일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회사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이나 마시던 너희가 나빠! 하지만 카라마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깨를 붙든 손을 털어내며 알아서 걷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거한들이 의외로 순순히 몸을 놓아 주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차의 문이 열렸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 새도 없이, 카라마츠는 그대로 밀려들어갔다. 이렇게 그 방에 사람들을 밀어 넣었던 건가, 몸이 심하게 흔들려 엉덩방아를 찧다시피 주저앉았다. 쓰러질 뻔하던 몸이 가벼운 충격과 함께 겨우 멈췄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올려다보았다.


 “Buonasera!”


 아까 그 흰색 남자였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알지 못하는 단어를 내뱉으며 남자가 팔을 벌렸다. 카라마츠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껌벅였다. 본능적으로 척추를 타고 한기가 오르내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외국인인가. 어딜 봐도 일본인, 그나마 다른 가능성을 연다면 한국인이나 중국인 정도로 보이는데. 어쩌면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일 수도 있지, 일본 선술집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도 그렇고.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남자가 쓴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차도 외국 차구나. 타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넓었던 건가.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눈만 굴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모자를 벗으며 남자가 히죽 웃었다. 드러난 덧니가 날카로워 보였다. 웃는 듯 훑어보는 시선처럼. 어쩐지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달라붙는 눈길이 끈질겼다. 어차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만한 공간도 없었지만.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구, 굿 이브닝?”


 남자가 김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탈리아 어 모르나? 뭐, 상관없지. 내가 일본어로 하면 되니까.”


 유창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본어였다. 뭐야, 그냥 일본인이었잖아. 괜히 놀리려고 한 건가.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카라마츠는 낡은 가방을 꼭 붙든 채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일단 애를 쓰기는 했다. 남자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라마츠는 뒤로 꼼질꼼질 물러나며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녹음 어플리케이션이라도 켜 놓아야 하지 않을까. 손가락으로 액정화면을 긁으며 카라마츠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뭐, 뭡니까.”

 “그 쪽에게 볼 일이 있어서.”

 “무, 무슨 일입니까.”


 설마 돈 문제인 걸까. 빚은 천지이지만 사금융에서 돈을 빌린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 장기를 떼이는 일은 없었던 게 다행이다. 나에게 돈이라니 어이도 없지. 꼬질꼬질한 회사원에게 무슨 돈을 뜯어내려는 건가. 저 머리에 대충 얹힌 모자만으로도 내 통장 잔고를 훌쩍 뛰어넘을 텐데. 글쎄 뭐, 내 장기를 팔면 저 모자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된 생각이 증발했다. 지금 느끼는 것이 긴장감인지 짜증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신, 목소리 좋던데.”


 그나마 떠오르던 몇 가지 말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걸 봤다고? 지저분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사를 읊던 꼬락서니를 봤다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보았기를 바랐던 모습을 봤다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 퍼포먼스 한 번 더 보고 싶어. 보여 줘.”

 “왜죠?”

 “다시 보고 싶으니까.”


 미친 놈 아니야, 카라마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집에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한다는 말이 겨우 연기 보여 달라는 건가.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자신이 무릎을 꿇을 때 마다 실실 웃는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저 짓을 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차라리 돈이라도 내던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렀다. 입술을 다시 한 번 세게 깨물자 제멋대로 내달리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신은 달리는 차 안에 갇혀 있고 앞에는 덩치가 둘이나 있다. 이 남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덩치들이 보스로 모시며 턱짓 하나에 움직이고 있다면 분명 야쿠자나 그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선택권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나갈 수는 더더욱 없고 나간다 해도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이 외국인인지 뭔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 나았다. 거절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보고 나면, 보내 줄 겁니까?”

 “물론.”


 그래,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할까. 부장보다는 낫겠지. 이 남자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칸막이는 단단하게 닫혀 있어 사실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기는 무대다. 진짜 무대에는 단 한 번도 올라서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대다. 눈을 뜨자 살짝 넓은 차 안이 좀 더 넓은 다른 공간이 되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 중 하나다. 카라마츠는 입을 열었다.


 

 마지막 대사가 끝났다. 깊은 숨과 함께 카라마츠는 이상입니다, 하고 중얼대며 시트에 앉았다.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표정이 굳은 채로 끊임없이 카라마츠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스쳐지나갈 때 보다 더욱 사람을 납치해서까지 보여 달라고 졸라댈 때는 언제고, 막상 보니 실망한 건가. 그런 거면 차라리 그냥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저, 다 끝났는데요….”


 남자가 퍼뜩 놀라며 눈을 크게 깜박였다.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설마 얼굴 뻘개질 정도로 화가 났나? 아, 그냥 아까 저 덩치들이 말을 걸었을 때 바로 도망갈걸 그랬어. 이 남자라면 카라마츠 같은 소시민 하나는 사회에서 쉽게 지울 수 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의 안전은 이 좁은 공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부장의 고함소리는 차라리 훨씬 더 논리적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남의 생명을 얼마든지 망가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의 명줄을 손에 쥐고 있다. 고작 연기 한 씬을 가지고.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내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 꽉 붙들어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술기운이 날아갔다. 


 “Bravo!”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손뼉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남자의 표정은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옷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낸 아이의 얼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심장을 콕콕 찔렀다. 의외네, 야쿠자인지 뭔지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뭐야, 아까보다 더 잘 하잖아. 굉장히 마음에 들어. 목소리도, 발성도, 표정도, 연기도,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좋은데.”

 “가, 감사합니다…?”

 “그 부분이 좋아. 주방에서 나온 신데렐라에게 말을 걸 때. 이 사람인가, 하고 긴가민가하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눈빛이. 왕자가 확실히 신데렐라에게 반해 있고 그녀를 기억한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어. signore, 당신 대단한 걸. 어느 한 구석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없는데. 특히 목소리. 연기하는 톤도 그냥 말할 때도 모두 듣기 좋아. 깨끗하고 명확해.”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였다. 학생 때에는 그저 외우기에 급급했고, 술자리에서 수십 번을 되풀이 할 때에는 웃음만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울컥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사람이란 단순하구나. 그렇게 들끓어 오르던 생각이 말 한 마디에 풀어지니.


 “감사의 뜻으로 집에 모셔다 드리지, signore. 집이 어디야?”

 “아카츠카 구, 나카무라쵸….”

 “어이, 들었지? 여기서 별로 안 멀군. 그 쪽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곧 이어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이 차가 아직 움직이지 조차 않았다는 걸 알았다. 생각이 널을 뛰어 차가 움직이는 것조차 몰랐다니, 정말 우습지도 않다. 어쩌면 당장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창밖의 풍경이 뒤로 달아나며 달각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갈 수 없다. 상황은 다 끝났는데도. 

 그래도 거한들에게 붙들려 차에 탈 때 보다는 조금 나았다. 적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꽤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몸이 서서히 나른해졌다. 아, 다행이다, 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있어서.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이불 속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 어차피 서너 시간 밖에 못 자겠지만.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카라마츠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옆에서 몇 번인가 가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 복권에라도 맞지 않는 한 이런 차는 탈 수 없겠지. 탄 김에 찬찬히 기억해 두자. 스스로 생각해도 촌스러운 짓이었지만 어차피 이 남자와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이 차, 마음에 들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펄쩍 뛰며 가방을 끌어안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자가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귀 옆에서 나른하게 울렸다. 온 몸으로 소름이 퍼져나갔다. 


 “마, 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제 차도 아니고.”

 “가지고 싶어?”

 “됐습니다.”

 “헤에, 뭐야. 농담이라고, 놀랄 필요 없어. 하지만 그런 연기력이었다면 진즉 스타가 되어서 이런 차 정도는 그냥 끌고 다녔을 텐데. 성우라도 할 수 있었을 걸. 연극부였다고 했지?”

 “그 새 들었군요….”

 “함께 있던 그 뚱땡이가 그렇게 크게 말하는데 못 들을 리가 있나. 그런데 그 자식 못 쓰겠더라, 젠장. 보기만 하는데도 발 냄새가 다 올라오는 것 같더라니. 다리에 털도 있고. signore의 연기력은 그런 녀석 신발이나 신겨 주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니까요.”


 집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늘 전철에서 바라보는 거리지만 정작 그 속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으려니 어색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저 쪽에 있는 건물을 보아하니 나카노 역 근처인가. 빨리 도착하면 좋을 텐데. 남자의 손이 목을 둘러 어깨를 쥐었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전에 몸에 소름을 넘어 한기가 올라왔다. 뭐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야. 외국에서는 다 이런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감싸 잡고 그러나?


 “뚱땡이 같은 건 됐어. 저런 놈의 면상에 샷 건을 갈길 수도 없다니 회사원 생활도 장난이 아니군. 어쨌거나 그 정도면 스카우트도 받았을 것 같은데. 잘 안 됐나 봐?”

 “아뇨, 저 무대 올라간 적 없습니다.”

 “엑, 거짓말! 어째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연극부였지만 무대에 제대로 오른 적이 없었다. 1학년 때에는 무대도구를 만들거나 무대 뒤에서 보조를 했고, 2학년 때에는 말 한 마디 없이 뒤를 지나가는 단역으로 끝이었다. 3학년 때에 가서는 부원 사이의 이지메와 성추행 문제에 휘말려 여자 부원 일부와 남자 부원 대다수가 나가 버렸다. 폐부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남은 사람들끼리 꾸려가자고 선택한 것이 신데렐라였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여성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왕자 역할은 자동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3학년 남자부원인 카라마츠의 차지가 되었다.

 3학년이었고, 무대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연극이었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필사적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탈퇴 부원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신경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학교 축제는 시작도 하기 전 화학부에서 화재를 일으켜 중지되었다. 강당은 무사했지만 학생 하나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실려 갔으니 중지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 달에 한 번 이상 술자리에서 지겹게 아저씨의 신발을 신겨 주고 있으니, 뭐 어떻게든 무대에는 오른 셈인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처음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카라마츠의 연기를 보며 웃거나 가엾어 하기만 했을 뿐 사정은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았자면 다른 의미로 매일 언급되었을 테니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자신은 긴장한 건가 마음이 풀어지고 있는 건가.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어대다니.


 “아깝네. 정말로.”

 “그렇죠. 뭐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어깨에 있던 손이 목 뒤로 옮겨왔다. 맨살에 조금 차가운 손이 닿으니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목을 누르는 힘에 남자의 얼굴 쪽으로 끌려갔다. 가깝다. 너무나 가깝다. 나른한 듯 일렁이며 빛나는 눈이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다. 향수 냄새가 짙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숨소리가 다가온다. 뒤로 물러나 보았지만 몸이 붙들린 이상 별 소용이 없다. 코끝이 닿을 것 같다. 외국인이라도, 이렇게는 안 할 거야!


 “좋아, 음, 뭐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아니지 오히려 괜찮네, 무대에 정말로 올라가서 명성을 얻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귀찮았겠군. 이렇게 별빛처럼 빛나는 사람이 정말 하늘에 떠 있었다면 잡기 힘들겠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남자가 히죽 웃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그대로. 목을 누르던 손에 힘이 더해진다. 숨결이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아니 코가 코끝에 닿아 간지럽다. 향수 냄새가, 아니 잘 모르는 담배 냄새가 아직 남아 있던 알코올과 섞여 뇌를 어지럽힌다. 남자의 눈빛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마치 무언가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입술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이상하게 우그러지는 비명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남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퉁퉁 두들겼지만 다른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야쿠자는 야쿠자인가, 남자의 힘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악스러웠다. 입술이 몇 번인가 부딪혔다가, 곧이어 입 속으로 살덩어리가 들어왔다. 온 몸에 경보가 울렸다. 소름보다 더 대단한 느낌에 온 몸이 굳었다. 이건, 뭐야, 이건, 아니잖아. 나는 그냥, 그냥 끌려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런데 마음대로 어깨에 손을 얹고, 목덜미를 만지고, 키스를 하고, 심지어 첫 키스인데, 남자의 혀가 자신의 것을 꾹 눌렀다. 타액이 섞였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오만가지 감정과 알코올과 남자의 체취가 얽혀 정신이 아득해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남자의 옷깃을 꾹 쥐었다. 몸이 뜨거워지는 건지 숨을 못 쉬어 죽어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남자가 물러섰다. 할딱대며 숨을 고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뭐야, 키스는 익숙하지 않은 건가?”


 뭔 소리인지 해석조차 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상황을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생각은 헛돌기만 할 뿐 제대로 가닥이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추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아쉽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카라마츠도 멍하니 반대편 창 바깥을 훑었다. 아는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집이다. 아, 그래, 집이지. 다 왔구나. 이제 언제든 내리기만 하면 되는구나. 문이 달각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배실배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남자의 풀어진 얼굴과, 방금 전 입술을 닦아낸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군. 그렇지만 나는 이 만남을 한 번으ㄹ커헉?!”


 시트 위로 배를 부여잡고 거꾸러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카라마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괜찮은 킥이었다.

Posted by *루미*
2016. 8. 8. 00:48

이치카라 AU/ 돈이치x히라카라(돈히라)

1편 / 2편 / 3편


*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용도로 일정분량 완성할 때마다 올립니다.

* 이 글은 퇴고를 거쳐 카라른 온리에 동인지로 낼 예정입니다.

* 그래서 아마 중반부까지만 연재하고 나머지 미공개분은 동인지로 확인해주세요ㅠㅠ 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개에게 물렸다, 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카라마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개에게 물렸다. 그랬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주변은 부장이 누군가에게 고함치는 소리와 그 와중에 걸려온 클레임 전화로 전쟁통이었고 아무도 카라마츠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부장이 들었다면 부장의 고함을 듣는 사람은 바로 카라마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욕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함을 듣는 시간이 늦춰질 뿐이다. 팀장을 뺀 팀원은 10명, 근무시간은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공식 8시간 비공식 6시간. 하루 한 사람씩 한 시간 동안 붙들고 괴롭혀도 시간이 남는다. 그 중 한 사람은 열외지만.

 몸과 마음이 동시에 울렁거려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움츠려 최대한도로 부장의 시선에서 숨기로 했다. 다른 회사에서는 이런 날 휴일을 쓴다는 것 같았지만 꿈같은 이야기였다. 근로기준법은 회사의 구성원들에게 휴가를 주고 쓰도록 하지만, 휴가 신청 후 억지로 회사에 나오거나 일거리를 집에 안고 돌아가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이, 마츠노오!”


 생각의 끈이 덜컥 끊겼다.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예에, 하고 되도록 친근한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아, 제발, 차라리 내일까지 완성해야만 할 일감을 몇 개쯤 안겨주는 편이 낫다. 머리는 아프고 속이 울렁이는 이 상황에서 부장의 욕지거리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제 저녁 미팅 내용, 점심시간 전까지 보고서로 내!”


 되도록 평온한 눈빛, 평온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았다. 왠지 생명이 연장된 느낌이다. 오전까지 완성하라고 한 보고서가 두 개인가 더 있었지만, 분명 부장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야동 사이트를 돌다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 뻔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미팅도 아니다. 저쪽 회사의 부장인가 하는 사람과 이쪽의 부장이 술집에서 의기투합해 코가 비뚤어지게 퍼마시고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어차피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부장은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카라마츠는 잠시 부장이 이 회사의 내부 비밀을 모두 주절주절 불어 버렸다고-사장이 불륜중이지만 발기부전이라 젊은 애인을 만족시켜 주질 못한다던가-써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월급날까지는 아직 2주가 남아 있었고, 빚을 완전히 변제하려면 2년 이상 더 일해야 했다. 돈은 저쪽 회사에서 낸다고 해 비용 처리를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뭐 알아서들 하시겠지, 5만 엔 정도 나온 것 같은데.

 돈이나 보고서 따위는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날 밤 짧지만 강한 해프닝이 있었다. 사람을 하루 종일 마음 복잡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일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나가는 가엾은 직장인일 뿐이다. 한때는 화려하고 매일이 두근거리는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봐, 마츠노 씨.”


 옆자리 직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라마츠는 부장에게 보인 온화한 미소를 그대로 가져갔다. 대꾸는 굳이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멋대로 말을 꺼냈다.


 “아~저번에 그거 말야, 시장분석, 내가 오후에 외근을 나가야 해서 완성을 못 할 것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상대의 도와달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안 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다 쓰라는 뜻이다. 외근이라니 어디 번화가에 놀러나가 여자 구경이나 하거나 애인을 불러다 드라이브나 가겠다는 거겠지. 카라마츠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고마워, 마츠노 씨, 하고 다시 뭔가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이 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장은 불륜을 저지르고 들킬 때마다 아내에게 납작 엎드려 빌며 아내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주었다. 옆자리 동료-동료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는 사장 아내의 조카였고 사장의 자숙 기간을 틈타 이 회사에 무사히 안착했다. 카라마츠가 빚을 다 갚을 때쯤이면 남자는 회사의 중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카라마츠가 써 준 보고서를 자신의 것으로 내밀어서. 그 때가 되어 무참히 쫓겨나지 않으려면 웃는 낯으로 그가 떠넘기는 일을 받아 들여야 했다.

 이딴 회사, 정말로 불에나 타 버리라지. 그렇게 해서 내가 죽으면 얼마나 나올까. 장례식 비 정도는 나오려나. 그 정도로는 빚을 상환할 수 없겠지. 생각은 몽실몽실 커져갔다. 빚, 몇 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 그래도 제법 행복했던 학생 시절, 웃으며 했던 연극부 활동.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면이 잘 안 보이는 척 모니터 가까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신의 생각을 누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신체의 사소한 변화를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만의 비밀로 천천히 묻어가다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당신, 발성 좋은데.

 어제 만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카라마츠는 그 남자와 키스했다.

 첫 키스였다.

Posted by *루미*
2016. 6. 19. 22:02

안녕하세요? 루미입니다. 다시 한 번 갈림길을 휴재해야 할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립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시 휴재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ㅠㅠ 

제가 곰손이고 현실의 역습은 끊이지 않고! 특히 8월에 일 주일 단위의 서로 다른 온리전 두 개를 신청하여 동인지 최소 2~3권을 써야 하는 운명에 놓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갈림길을 다시 잠깐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미뤄진거지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ㅠㅠ 대신 연습 겸 온리전용 원고를 어느 정도 쓰는 대로 설렁설렁 올려 보는 걸로 하겠습니다ㅠㅠ 기대하셨던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Posted by *루미*
2016. 6. 13. 00:51
파트 1) 1편(12/27 수정) / 2(0)편(R19) / 2편 / 3편 / 4편 / 5편 / 6편 / 7편 / 8(0)편(R19) /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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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0)/14(0)편을 읽지 않아도 이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은 없도록 했습니다만, 성인분이시라면 2편/8편/14편을 읽기 전 먼저 2(0)/8(0)/14(0)편을 읽으시는 쪽을 권장합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다음 기회에.

2(0)/8(0)/14(0)편 비밀번호는 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17813)의 ISBN번호 끝 4자리입니다.

* 원작 16화에 영향을 받아, 1~5화와 6화 사이의 이치마츠에 대한 서술이 달라졌습니다. 앞부분은 캐붕이 없으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주 천천히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5편은 아마도 마지막 주사위라 호감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체크했습니다.

길어서 접습니다.



 눈가가 시큰했다. 후끈하기까지 했다.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둔한 통증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카라마츠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꽤 무리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여파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다. 눈꺼풀이 슬슬 무거워졌다. 하품이 나왔다. 근처에 이불이 있던가, 카라마츠는 근처에 널브러진 이불을 끌어당겨 그 속으로 쏙 들어갔다. 저녁 시간이 되려면 꽤 남았다. 그 사이에 한숨 푹 쉴 수 있을 것이다. 밤에 잠이 안 오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지 뭐. 누구에게든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해도 되고.

 머리 위로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카라마츠으, 잘 거야? 형아랑 놀아 준다며.”



 놀자고 해 놓고 먼저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 버린 건 너입니다만. 카라마츠는 눈을 가늘게 떠 오소마츠의 옆에 쌓인 만화책을 세어 보았다. 아직 열 권 정도는 남았다. 얼마나 빌려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일까지는 읽어야 다 읽겠다 싶다. 그러면 나는 좀 더 자도 되겠지.



 “응, 좀 피곤하군…. 만화책이나 계속 봐라.”

 “놀자아.”

 “만화책 볼 거잖아.”

 “카라마츠가 안 놀아줘서 만화책 빌려 온 거라구! 너어무하지 않아? 형아는 이렇게 카라마츠를 원하고 있는데! 카라마츠는 완전 병든 닭 되어선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이게 누구 때문인데!”



 솔직히 오소마츠가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지! 카라마츠는 당장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주먹에 뭔가 부딪히며 오소마츠가 펄쩍 뛰어올랐다. 누가 밟은 개구리인형처럼 어설픈 비명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음, 괜찮은 곳에 맞은 모양이군. 적어도 반성은 할 수 있는 그런 위치.



 “으악! 아파! 형아 무릎관절 다 나간다! 카라마츠가 형아를 불구자로 만들려고 해!”

 “그러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렇게 귀찮게 굴어 놓고!”



 어떻게든 셋이 함께 샤워를 하러 들어간 기억은 있었다. 셋이 좁은 욕실에서 함께 부대끼다니, 좀 징그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이 이상하게 무거워 두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씻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둘에게 또 손장난을 당해서, 겨우 다 씻고 나와 아침인지 점심인지를 먹을 때쯤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 몸이 무거웠고 목도 잔뜩 잠겼다. 셋이 해서 그런 건가, 두 사람과 각각 했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나도 완전히 갈 데까지 갔군. 타락은 길티 가이의 숙명인가.



 “오소마츠.”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오소마츠가 당장 카라마츠의 옆에 드러누웠다. 잔뜩 쌓인 만화책 더미도 잊지 않았다.



 “너는 안 피곤해?”

 “형아는 괜찮습니다마안. 음, 카라마츠, 어디가 아파? 목이 다 쉰 건 알겠지만.”

 “허리. 다리. 팔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이고 죄송합니다 형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

 “별로 안 미안하잖아.”

 “아이쿠 이런 들켰네!”



 오소마츠가 시원하게 웃으며 배를 깔고 누웠다. 만화책 종이가 팔락대며 가볍게 넘어갔다.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시큰하게 뜨거운 눈을 견딜 수가 없어,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 햇볕의 잔상이 붉게 남았다. 확실히 힘들긴 하지만 하루 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벌써 회복해서 잘만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짜증이 나,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다리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자기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앓아누워 있는데 신나서 만화책이나 읽으며 시시덕대고 말이야. 다른 가족들은 내가 감기에 걸린 걸로 알고 있을 텐데.

 마음 한 구석이 살짝 까실까실하게 쓸려나갔다. 가족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카라마츠와 알고 지내던 불치병의 여자애가 죽었다고만 생각할 뿐, 그 뒤에 얽힌 다른 사정은 모른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지만. 우리는 괜찮을까. 괜찮을 수 있을까.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언젠가는 분명 들키게 될 텐데, 이 비밀을 셋이 함께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쌓이고 쌓여 마음을 흔들어댔다. 조금만 삐끗하면 당장 수라장이 펼쳐질 테고, 그리고 그 때에 가족들은,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어떤 상처를 받게 될까.

 이불 속으로 쑥 들어온 오소마츠의 다리가 카라마츠를 툭툭 건드렸다. 잠에서 깨라는 건지 같이 이불을 덮자는 건지 모르겠다. 흔들리던 생각들이 하나하나씩 조용히 가라앉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단순하구나. 카라마츠는 다리를 쭉 뻗었다. 오소마츠의 다리와 얽혔다. 이불과 함께 몸이 바닥을 쭉 미끄러져 오소마츠에게 닿았다. 얽힌 다리가 무겁다. 불편하다. 따뜻하다. 좀 더 이렇게 있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단순하구나.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 닿는 것만으로도 생각이란 것들이 다 날아가다니.



 “오소마츠.”

 “어엉.”

 “좋았어, 새벽에?”



 격렬하게 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어 오소마츠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행동에 걸맞은 얼굴일 것이다. 카라마츠는 입꼬리만 들어 올려 씩 웃었다.



 “어, 지인짜 좋았어.”



 한 구석이 풀려 늘어진 것 같은 목소리라 카라마츠는 다시 한 번 말없이 미소 지었다. 한없이 얼빠진 목소리인데도 그저 듣고 싶었다. 철이 들어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확실히 대면할 수 있었을 때부터 항상 그랬다. 오소마츠의 모든 것은 카라마츠에게 의미가 있었고, 소중한 것들이었다. 얽혔다가 스스로의 손으로 풀어냈을 때에도, 그리고 다시 얽힌 지금도.



 “나도 좋았어, 오소마츠.”

 “좋았다니 누구 쪽? 누구 쪽이 더 잘했어?”

 “대답이 꼭 필요한가? 정신없이 해서 모르겠는데. 일대 일로 다시 한 번 해 봐야….”

 “엑, 싫어싫어싫어! 형아가 더 잘 한다고 말해 줘! 지금 당장!”


 뜨거운 손이 카라마츠의 뺨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하지 마라, 고 말은 했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오소마츠의 얼굴이 보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손가락이 앞머리를 헤쳤다. 이마를 몇 번인가 맴돌다 눈썹을 쓸었다. 집요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간지러워 킥 웃었더니 이마에 뭉클한 것이 닿았다. 숨소리가 가까웠다. 숨결이 속눈썹을 간질였다. 주변 공기가 온통 오소마츠의 냄새로 물들었다. 콩콩 뛰는 가슴이 조금씩 느리고 흐릿해졌다.

 내내 덜걱대던 생각은 셋이 함께 끌어안고 밤길을 걷고 몸을 섞으며 자신의 손을 떠나갔다.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만큼 마음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두 사람을 향해 흘렀다. 길은 정해졌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걸어 그 길을 따라갈 용기가 필요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움직여 주었던 두 사람을 위해.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너희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게 될 때 까지.

 책장 넘기는 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오소마츠의 온기는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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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
2016. 6. 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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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2) 9편 / 10편 / 11편 / 12편 / 13편 / 14(0)편(R19) / 14편 / 15-1편


* 2(0)/8(0)/14(0)편을 읽지 않아도 이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은 없도록 했습니다만, 성인분이시라면 2편/8편/14편을 읽기 전 먼저 2(0)/8(0)/14(0)편을 읽으시는 쪽을 권장합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다음 기회에.

2(0)/8(0)/14(0)편 비밀번호는 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17813)의 ISBN번호 끝 4자리입니다.

* 원작 16화에 영향을 받아, 1~5화와 6화 사이의 이치마츠에 대한 서술이 달라졌습니다. 앞부분은 캐붕이 없으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주 천천히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4편은 호감도 이벤트가 없습니다.


 카라마츠는 느리게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어딘가에서 햇볕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만 겨우 알았다. 온 몸이 나른했다. 깊은 곳에서 은근한 통증이 슬슬 올라왔다. 어째 좀 더운 것도 같고, 무겁기까지 했다. 코를 간지럽히는 가느다란 것이 거슬려 팔을 움직여 보았지만 다른 사람의 살덩이가 얽혀 있어 쉽사리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카라마츠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다른 사람의 머리통을 겨우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치마츠다. 이치마츠가 낮게 코를 골 때 마다 가벼운 숨결이 쇄골 근처에 와 닿았다. 팔을 꾹 누르고 있는 날것의 체온도 이치마츠의 것이 틀림없었다. 왜지, 생각할 틈도 없이 뒤 옆에서 누군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 못해 잘 알고 있다. 오소마츠가 무어라 희미하게 웅얼대다, 카라마츠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남의 살이 스치는 감각에 카라마츠는 몸을 움츠렸다.

 둘 다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상태라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끈끈하고 달콤하게 몸을 휘어잡은 온기가 놓아 주지 않는다. 도망갈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맛보고, 휩싸여서 잠들고 싶었다. 응, 괜찮잖아, 이 정도는. 이 몇 시간 동안 너무 힘들었어. 그냥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싶어.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데, 이렇게 따뜻한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서서히 또렷해지는 이성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조금만 더 잘래….

 어젯밤에 도대체 뭘 한 거야.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아팠지만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잘 아는 방. 구석에 처박힌 세 사람분의 옷. 반쯤 흘러내린 이불 속 형제들의 알몸. 역시 맨몸인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이빨자국에 멍과는 다른 빨간 자국들이 요란하다. 엉덩이 안쪽이 미끈미끈하고 축축하고 불쾌했다. 잠깐, 잠깐. 진짜야? 오소마츠가 추웠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챘다. 이치마츠는 그렇잖아도 웅크린 몸을 더욱 움츠리며 카라마츠의 몸이 있던 곳을 더듬대다 다시 멈추었다. 세상에, 진짜로. 

 어떻게 하지.

 한 사람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둘 모두와 함께 밤을 보내다니.

 카라마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치마츠와 몸을 섞었을 때에도 술에 잔뜩 취해 감정이고 몸이고 컨트롤할 수 없었을 때였다. 세상에. 어젯밤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는. 나는.


 “어우, 이불 좀 덮어…. 형아 춥다.”

 “아, 미안.”


 이불을 끌어당기려는 손목이 붙들렸다. 몇 시간 동안 시달린 탓에 힘이 남아나질 않은 몸은 쉽게 오소마츠 쪽으로 끌려갔다.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한 몸이 등 뒤에서 카라마츠를 온통 얽어맸다. 맞닿은 피부 아래로 심장이 뛰는 느낌이 고스란히 다가왔다. 불안하던 마음이 희미해졌다. 이렇게 있으니까 어쩐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오소마츠.”

 “엉.” 

 “미….”

 “미안하다고 하지 마.”


 어깨 옆으로 가벼운 한숨이 지나갔다. 


 “너, 나랑 하기 싫었는데 한 거야? 이번 것만 대답해.”

 “…그건 아니지만. 하고…싶어서 하긴 했지.”

 “이치마츠랑은? 아 물론 이것도 이번 걸로.”

 “…물론 이치마츠랑도 하고 싶어서 했는데.”

 “그럼 그걸로 됐어.”


 아직 졸린 기가 좀 남은 건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뱅글뱅글 맴돌다 머릿속으로 굴러 들어왔다.


 “나는 너랑 진짜진짜 하고 싶었거든. 저번에 했을 땐 몸은 되게 좋았는데 기분은 별로였잖아. 너랑 다시 한 번 몸도 기분도 좋은 섹스 하고 싶었어. 그래서 형아는 대만족.”

 “…음, 그건 확실히 고마운 일이긴 하군.”

 “그러니까 너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텐데 뭐. 그렇지?”


 부드러운 살이 목덜미를 스쳤다. 카라마츠가 흠칫 떠는 게 기분 좋았던지, 오소마츠가 어깻죽지에 입을 맞추었다. 쪼옥 하는 소리가 좁은 방을 울렸다. 너 이 자식 일부러 그러는 거지. 팔꿈치로 쿡쿡 밀어 보았지만 오소마츠의 장난질은 그치지 않았다. 


 “우리 다 좋아서 한 거잖아.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뭐, 지금 좋으면 된 건데. 강요한 것도 아니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고.”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뾰로통하게 굳은 이치마츠의 얼굴이 이불 위로 쑥 올라왔다. 일어나 있었냐. 등 뒤에서 오소마츠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를 붙든 팔은 좀 더 단단하게 굳었다.


 “아이쿠 우리 동생, 찔리는 게 있으신가 보지?”


 이치마츠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단단히 화가 났군.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이치마츠의 뺨을 쥐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표정이 살짝 놀랐다가 서서히 누그러져 갔다. 오소마츠가 흐응, 하고 열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살살 쓸어주자 이치마츠의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리다, 가슴 쪽으로 푹 안겨들었다. 맨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알아, 처음부터 완전히 내가 잘못한 거. 반성해. 하지만 그거 절대 사과 안 할 거야. 나중에 제대로 갚아줄 거니까.”

 “브라더, 보통 이럴 때 갚는 쪽은 나라고 보는데….”

 “시끄러워, 썩을마츠.”


 허리 위로 팔이 얹혔다. 그대로 끌려간다. 항의하기도 전, 다리가 단단히 얽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니 뭐지 이건, 어깨는 오소마츠에게 붙들려 있고 다리는 이치마츠에게 붙들려 있고. 무엇보다 불편하잖아 이거.


 “이치마츠, 좀 힘든데….”

 “시끄럽다니까, 참아.”


 이치마츠가 웅얼댈 때 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숨결이 닿았다. 하지만 아래에서 빼꼼히 올려다보는 건 확실히 좀, 쓰다듬어주고 싶고. 그래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이치마츠가 샐쭉해져서 이마를 가슴에 쿵 찧었다. 아파서 크엑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자 만족한 듯 이치마츠가 히죽 웃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데 내가 이러는 건 참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런데 나는 너 안 놔 줄 거야.”

 “뭐야, 그게!”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대며 이치마츠의 어깨를 꾹꾹 밀어내다. 이치마츠가 몸을 팩 일으켜 오소마츠의 팔을 쳐냈다. 오소마츠가 호오, 형아에게 대들어? 하며 으르렁대더니 벌떡 일어서 이치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남아 있는 손을 뻗어오는 걸 이치마츠가 간신히 잡아냈다. 순식간에 둘은 서로의 손을 붙들어 씨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 아래 갇힌 카라마츠는 천장과 그 사이에서 오가는 양 팔을 바라보다 두 사람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런, 브라더들이여,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나를 사이에 두고 씨름하는 건 좀 힘들군. 내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겠어?”

 “넌 좀 닥쳐 봐라 썩을마츠.”

 “카라마츠? 가만있어 볼래?”


 아니 나 지금 숨 막힐 것 같은데. 너희가 자꾸 허벅지로 나를 걷어차는 것 같은데요. 너희가 무릎으로 찍는 그게 내 옆구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요.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기를 잔뜩 담은 높은 목소리가 문을 뚫고 들어왔다.


 “일어나, 이 망할 놈들아! 어젯밤 상가 다녀온 걸 봐 줬더니 아주 점심시간까지 쳐 자고 있지? 깼으면 당장 튀어나오지 않고 뭐 하고 자빠진 거야?”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방 안을 뒤흔들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쳐들어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들어왔다면 아마 맨몸으로 내쫓겼을 지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집을 나갈 때에는, 돌아올 때에는 정말 죽어 버리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사람 마음이 이렇게 얄팍할 줄은 몰랐네요. 분명 누군가의 죽음을 짊어지고 왔는데,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이 드잡이질을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웃을 수 있다니. 누군가 깨워 주는 것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니.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안심할 수 있다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지금은 살아 있어. 숨 쉬고 있어. 누군가 나를 붙들어 주고 있어. 그러니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서로가 마음을 마주하고 선택하고 정리할 때 까지.

 덜컥 멈춘 두 사람이 묘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내려다보았다. 오소마츠는 한숨을 쉬고, 이치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서로의 손을 놓았다. 그 표정이 또 절묘해, 잦아들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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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
2016. 6. 6. 19:0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2016. 4. 24. 20:37

안녕하세요? 루미입니다. 잠시 휴재해야 할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립니다. 

별다른 건 아니고 개인사 및 개인 동인활동 때문입니다. 처리해야 할 것들 다 정리하고 내용을 좀 더 정비한 뒤 연재 재개하겠습니다. 특히 '갈림길'의 경우, 8월 카라마츠 수 온리전에서 동인지로 낼 계획이기 때문에 휴재는 해도 연재중단은 없을 겁니다*^_^*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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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
2016. 4. 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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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0)/14(0)편을 읽지 않아도 이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은 없도록 했습니다만, 성인분이시라면 2편/8편/14편을 읽기 전 먼저 2(0)/8(0)/14(0)편을 읽으시는 쪽을 권장합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다음 기회에.

2(0)/8(0)/14(0)편 비밀번호는 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17813)의 ISBN번호 끝 4자리입니다.

* 원작 16화에 영향을 받아, 1~5화와 6화 사이의 이치마츠에 대한 서술이 달라졌습니다. 앞부분은 캐붕이 없으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주 천천히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3편은 세 사람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선은 호감도 측정에만 사용합니다.

홀 오소마츠 짝 이치마츠

결과: 7-선 오소마츠


호감도 결과: 464

4차까지의 결과-오소마츠 1968, 이치마츠 2032

5차 결과-오소마츠 464, 이치마츠 536

총합계-오소마츠 2432, 이치마츠 2568(차이 136)

총 호감도 5000, 3% 보정범위 150. 현재 보정범위 이내입니다.

차회에는 보정범위가 없습니다...라고 하려 했으나 여전히 3%로 유지합니다. 


추가 행동을 지정합니다.

1~33 오소마츠, 34~66&100 둘 다,  67~99 이치마츠

결과: 53-함께

'함께' 의 결과가 나왔으므로, 추가 어드밴티지는 부여하지 않습니다.


가위바위보-1~33 가위, 34~66 바위,  67~99 보, 100 안 내서 술래

오소마츠 77(보)

이치마츠 25(가위)

이치마츠의 승리. 이 결과는 유용하게 쓰일 예정입니다


 


 왠지 자리에 사포를 깔아둔 듯 깔깔했다. 양 옆 동생들의 숨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평소라면 분명 들리지도 않을 텐데. 오소마츠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 토도마츠가 서라운드로 부스럭대지 말라고 투덜대는 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건너편에서 나직한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미안하다고 웅얼대는 것 같았다. 소리가 방 안에서 사라지고, 어둠이 방 안을 꼭꼭 채웠다. 카라마츠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일 것 같은데, 고독과 정적.

 카라마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너는 무슨 심정으로 그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거냐.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바로 뛰어나갔으니 살필 시간도 없었다. 차라리 함께 따라 나갈 걸, 오소마츠는 느린 후회를 하며 다시 한 번 돌아누웠다. 역시 따라 나갔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을 공유하던 상대가 세상을 떠났는데, 카라마츠가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돌아올 수 있을 리 없다. 깎여나간 마음을 주워줄 수는 없다 해도 옆에는 있어 줘야 했다. 

 하얗게 질린 카라마츠가 검은 옷을 입고 집을 나간 것은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잘 준비를 하던 형제들은 차남의 갑작스러운 외출 채비에 당황했다. 누군가의 질문에 카라마츠는 장례식, 이라고 짧게 대답하며 옷장에서 검은 양복을 꺼냈다.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해진 사이 카라마츠는 옷을 들고 방을 나가 버렸다. 아래층에서 잠깐 두런대는 목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후에 문이 덜컥 닫히는 소리가 2층까지 울렸다. 장례식이라니 그 애겠네, 한참 뒤에야 쵸로마츠가 한숨 쉬듯 말을 꺼냈다. 형제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참 이상도 하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부고를 들으니 참 기분이 싱숭생숭하네. 오소마츠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불을 끄고 몇 번이나 기지개를 켰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쵸로마츠가 무어라 웅얼대는 것 같았다. 그냥 자라. 형아는 알아서 고민할게. 셀 수 없는 생각들이 오소마츠를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자면 편해질 텐데 잠은 생각에 밀려 다가오질 않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은 더디고 지루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가 버릴까. 일단 라인 보내 놓고, 동네도 한 바퀴 돌아보고, 돌아올 때엔 반드시 편의점을 지날 테니 거기 잠복하면 될 것 같은데. 문득 멀리서 다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가 화장실에라도 가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일어나 확 놀려 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진짜로 화장실 가나.

 소리는 오소마츠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췄다. 느릿한 목소리가 오소마츠 형, 하고 이름을 속삭였다. 뭐야, 이치마츠 이 녀석. 설마 톳티처럼 화장실 같이 가자고 칭얼대려는 거냐. 눈을 뜨니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나갈 채비를 다 한 것만 빼면.  


 “가자.”


 어딜?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이치마츠가 가자고 할 만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잠 안 오지? 가자. 병원 옆에 있는 절이야.”

 “어떻게 알았어?”

 “아까 핸드폰 봤어, 카라마츠가 옷 찾을 때.”


 거 참 철저하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만. 고양이랑 관련 없는 일에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다니 형아는 기쁘긴 한데 또 심란해. 카라마츠만 해도 벅찬데 이치마츠 너까지 왜 이렇게 모르는 모습을 자꾸 보여 주냐. 근데 그거 알아? 너 지금 되게 멋있다, 이치마츠. 형은 그래서 불안해. 네가 요즘 카라마츠에게 진심을 쏟아 붓고 있는 게 눈에 너무 잘 보이거든. 카라마츠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형아가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걔는 너의 그 진심에 이끌려가 버릴 걸? 순순히 내줄 생각은 없지만, 카라마츠의 마음을 억지로 돌릴 수도 없는데.

 오소마츠는 지체 없이 이불을 내던지고 튀어나왔다. 






 깊은 밤의 절 앞은 조용했다. 제법 번화가에 있는 큰 절이었지만 한밤중이어서인지 자동차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스님이 웅얼대는 소리, 가족들이 흐느끼는 소리만 간간히 흘러나왔다. 봄밤이지만 새벽 공기는 서늘하다. 담장 위에서 떨어지는 벚꽃 잎이 무거워 이치마츠는 어깨를 움츠렸다. 옆에서 오소마츠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 이치마츠는 무심코 재채기를 했다. 오소마츠가 픽 웃었다.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바닥에 담배를 눌러 끄며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너, 혼자 오려던 거 아니었어?”


 애초에 바로 따라 나갈 생각도 없었다. 카라마츠가 침착한 듯 허둥대는 통에 휴대전화를 들여다 볼 틈이 생기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어차피 직접 아는 여자애도 아니다. 산책하는 길에 그 옆을 지나며 살짝 들여다보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인연이다. 

 하지만 방문 너머로 사라지는 카라마츠를 보며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까끌까끌한 불편함은 초침이 몇 백 번 울린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다 옆자리가 식은 탓이다. 카라마츠가 나갔기 때문이다. 텅 빈 옆자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훑으며 이치마츠는 충동과 맞서 싸웠다. 시도는 했다. 이 일은 카라마츠의 일이었고, 자신은 어디까지 손을 뻗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섣불리 나섰다가 이제 겨우 거리낌 없이 잡을 수 있게 된 손을 놓쳐버리게 되면 어쩌지. 하지만, 여기에서 괜히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잡아야 할 때 붙들지 못하고 다시 멀어져 버리면 어쩌지. 서로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들쑤시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카라마츠 때문이다. 바보 같이 남의 마음을 끌어와 자신의 고민과 함께 짊어진 카라마츠 때문이다. 이쯤 생각하니 이상하게 성질이 났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면 당장 붙들어 와야지.

 그래서 오소마츠를 깨웠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형도 나에게, 도움 줬잖아.”

 “엉?”

 “우유.”

 “아, 뭐, 그거.”


 오소마츠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 완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냐. 그 때 우유 괜찮다고 해서 그대로 기다리게 만든 건 누군데. 울컥했지만 이제 와서 쫓아 보낼 수도 없다. 힘들 때에는 가장 원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쪽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카라마츠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역시 오소마츠겠지. 그렇지만 말야, 카라마츠. 네가 오소마츠를 발견하고 기뻐한다면, 그걸 나는 바라만 봐야 한다면, 정말로 굉장한 기분일 거야. 달까지 올라갔다가 땅에 처박힌 기분이 될 거야. 뭐, 나 같은 녀석에게 가장 어울리는 전개일 지도 모르겠지만.

 문 가까이로 여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 말끝을 익숙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오소마츠가 담배를 집어던졌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마츠노 씨.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네, 힘드시겠지만, 어머니도 몸조심하세요. 몇 차례의 인사가 오간 후 드디어 구두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둘을 발견하고 살짝 놀란 듯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등 뒤로 빛을 받고 있어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피로가 발목을 붙든 듯 무거운 발걸음이 몇 번인가 계단을 밟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치마츠가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먼저 튀어나간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팔을 붙들었다. 뒤늦게 이치마츠도 다른 쪽 손을 잡았다. 손이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제야 카라마츠가 두 사람을 겨우 눈에 담았다. 밤의 어둠을 모두 끌어 모은 듯한, 흐린 눈빛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치마츠는 그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힘주어 불렀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바보 같은 내 카라마츠.






 절까지 걸었던 30분의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잘 아는 곳이 아니었다면 분명 자신은 동네 어딘가에서 미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불단 앞에 앉아 있었다. 심장이 차가워졌다. 돌덩이가 구르듯 쿵쿵쿵 뛰었다. 이렇게 끝이 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인사를 나눌 시간은 있을 줄 알았다.

 마츠노 카라마츠 씨군요, 당신이. 멍하니 앉아 있던 카라마츠에게 웬 부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병실에 놓인 사진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딸의 말동무가 되어 준 카라마츠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멀쩡했어요. 결혼식도, 피로연에서도 시종일관 웃고 즐거워했고, 특히 신혼부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다들 흐뭇해했죠. 애들을 공항으로 보내고, 저희는 먼저 병원으로 돌아왔죠. 저녁식사 전까지 잠깐 자겠다고 해 혼자 놔두었다 식사를 들고 돌아와 오니 그만…. 그 아이도 그런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가 결국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흘렸다. 카라마츠는 어쩔 줄 몰라 그저 어깨만 붙들며 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이미 바싹 말라서 흉한 몸이지만, 그래도 최고로 예쁘게 하고 갈 거예요. 오빠의 기억 속에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남고 싶어요. 딱 한 번만이라도 새언니보다 예쁘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즐겁게 종알대던 그 말들은, 웃음소리는, 모두 죽기 전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태웠던 거구나.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난 후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어 떠나 버린 거야. 하지만 슬픔에 젖은 그녀의 모친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었으니까. 데굴데굴 구르던 심장이 자꾸자꾸 조각들을 뒤에 남기며 작아지는 것 같았다.

 오빠는, 압니까? 겨우 이어나간 카라마츠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가 이제 그 쪽에 도착했을 거예요. 당장 돌아온다고 하겠지만, 비행기 편이 될지…. 신혼부부가 돌아올 때쯤에는 장례식이 끝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빠의 결혼식에 힘내서 참석했는데, 정작 그 장례식에 오빠가 없다니. 구르던 심장이 결국 바닥에 부딪혔다. 파편이 몸 속 여기저기 박혔다.

 그녀의 생명은, 마음은, 이렇게 끝나 버렸다. 남은 것은 카라마츠 혼자뿐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해 왔었던 걸까. 똑같이 아픈 사람끼리 이야기하고, 서로의 상대에 대해 자랑하고, 그냥 비밀을 공유하며 아픔을 함께 달랬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거야. 혼자만의 비밀로 두었다면 어떻게든 누를 수 있었던 마음이 나 때문에 더욱 커지고 커져서 그녀의 희미한 생명까지 갉아 먹은 거야. 참을 수가 없어, 카라마츠는 엎드린 채 바닥에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미안해요.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데이트 연습 같은 건 하면 안 되었던 거야. 그랬다면 우리 둘 다 아무 일 없이 마음을 누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 우리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많은 것을 꼬아 버리지 못했을 텐데. 그랬다면 당신도 조금쯤은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이 봄이 끝날 때 까지는.

 오랜 기간 병을 앓고 있었다지만 이런 날에 갈 줄은, 누군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겠구나,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을 텐데 상까지 치르게 되었겠네. 어쩐지 그 말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아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망가트리고 만 자신이 이곳에서 그녀를 애도할 자격이 있는가. 이 선량하고 가엾은 가족에게 엄청난 죄가 될 비밀을 그녀와 나누어 가진 자신에게 그들을 위로할 자격이 있을까. 바닥이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일어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발인까지는 무리라도 나중에 꼭 한 번 찾아와 달라고 카라마츠의 손을 붙들며 신신당부를 했다. 차마 손을 뿌리칠 수 없어, 카라마츠는 결국 약속을 해 버리고 말았다.

 빛을 등지고 나오는 길이 힘들었다. 절 앞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올 때 마다 무거운 것이 온 몸을 내리눌렀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이대로 어둠 속에서 홀로 있고 싶었다. 차라리 사라져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가엾은 사람이 떠나갔는데, 나는, 이렇게 죄를 가지고 홀로 살아남아서,

 계단 아래에,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있었다.

 죄책감으로 헛것을 본 걸까, 카라마츠는 멍하니 생각하며 계속 발을 옮겼다. 다들 집에서 자고 있을 텐데. 한 걸음씩 다가가도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화가 난 건지 얼굴이 굳었고, 이치마츠는 불안한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역시 나 때문이구나. 내 경솔한 행동 때문에 사랑하는, 아끼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두 사람까지 엉망으로 휘말렸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는 그냥 처음부터 아무 것도 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한 달 전에 버렸다고 생각한 걸 다시 떠올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점점 무거워지던 몸이 마지막 계단에서 크게 흔들렸다. 단단한 손이 카라마츠를 붙들었다. 오소마츠, 진짜? 곧이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손이었다. 두 사람 다, 이곳에 있다. 자신을 붙들고 있다. 어째서? 설마 나를 데리러 와 준 거야? 이런 나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필사적으로 두 사람의 얼굴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등 뒤 절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둘의 얼굴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울기 직전으로 일그러진 표정의 이치마츠가 무어라 말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 그 목소리에 다 삭아버렸던 심장이 파들파들 떨리다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오소마츠가 붙든 팔을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았다. 카라마츠, 괜찮아, 카라마츠. 죄책감 속에서 다른 감정이 탄산처럼 치고 올라와 터지며 온 마음을 맴돌았다. 누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혼자 있어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얼굴을 마주하면 그럴 수가 없어. 

 여기에서조차, 내 잘못이 결국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된 이곳에서조차, 마음이 자꾸 너희를 향해 흘러가서 멈출 수가 없어.

 어떻게 하지.

 오소마츠의 팔에 손을 올리니 몸이 더욱 가까워졌다. 손을 잡은 이치마츠를 끌어당겨 어깨를 붙들었다. 두 사람분의 온기가 카라마츠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사고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집에 돌아가자, 카라마츠. 누구의 목소리일까. 더 이상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할 힘조차 없었다. 남은 것은 자신을 붙든, 두 개의 마음뿐이었다.

 카라마츠는 그 마음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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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
2016. 4. 4.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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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0)/14(0)편을 읽지 않아도 이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은 없도록 했습니다만, 성인분이시라면 2편/8편/14편을 읽기 전 먼저 2(0)/8(0)/14(0)편을 읽으시는 쪽을 권장합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다음 기회에.

2(0)/8(0)/14(0)편 비밀번호는 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17813)의 ISBN번호 끝 4자리입니다.

* 원작 16화에 영향을 받아, 1~5화와 6화 사이의 이치마츠에 대한 서술이 달라졌습니다. 앞부분은 캐붕이 없으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주 천천히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2편은 세 사람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선은 호감도 측정에만 사용합니다.


홀 오소마츠 짝 이치마츠

접힌 글: 결과: 93-선 오소마츠

접힌 글: 호감도 결과: 494

3차까지의 결과-오소마츠 1,474, 이치마츠 1,526

4차 결과-오소마츠 494, 이치마츠 506

총합계-오소마츠 1968, 이치마츠 2032(차이 64)

총 호감도 4000, 5% 보정범위 200. 현재 보정범위 이내입니다.

차회에는 보정범위를 3%로 축소합니다.


 



 병원의 주변에는 담장 대신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빽빽했다. 담장 대신 나무를 심자는 나라의 정책 때문이라던가, 언젠가 토도마츠가 이야기 해 준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이 슬슬 불고 있었지만 햇볕보다 강하지는 않았다. 굽은 등으로 하늘의 온기를 받아내며 이치마츠는 자신이 태양열 발전기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면 뭘 발전시켜야 할까. 아주 어렸을 적이라면 몰라도,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쓰레기였다. 아무 것도 될 수 없었던. 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차피 에너지가 있어 봤자 쓰레기가 할 만한 일은 없을 텐데. 금색 햇살을 받아 빛나던 풍경이 흐려졌다. 싸구려 옷에서 물이 빠지듯 색을 잃어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이치마츠!”


 세상의 색이, 파란색부터 되돌아왔다.  

 파란색 후드 티 에서 색이 흘러나왔다. 온 세상에 튄 파란색이 역시 파란 하늘 아래에서 제멋대로 변하며 다른 색이 되었다.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나뭇잎은 초록색, 꽃은 노란색, 근처에서 놀고 있는 여자애의 신발은 분홍색, 머리띠는 빨간색. 멈춘 기계에 동력원을 준 것처럼 살아나기 시작한 세상 한가운데 카라마츠가 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세상의 모든 색을 이끌고. 굵은 눈썹이 오르내리며 미소가 생겨난다. 하늘보다 더 눈부신.

 내가 미쳤지. 썩을마츠가 뭐라고. 이치마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을 씻고 다시 보니 예나 지금이나 한심하게 웃는 카라마츠가 어느 새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이치마츠, 오래 기다렸나.”

 “뭐, 별로.”


 어차피 따라와서 기다린다고 우긴 것은 자신 쪽이고. 날은 좋고, 아침에 고양이들에게 밥을 줘서 오후에 딱히 할 일도 없다.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엔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카라마츠는 의외로 순순히 승낙했다. 요즘 계속 이렇다. 이치마츠가 무언가 함께 하자고 하면 카라마츠는 거절하지 않는다. 카라마츠 역시 이치마츠를 부르고, 권하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옥상 위에서 듀엣을 부르자고 했을 때에는 걷어찼지만.

 어제는 함께 고양이 밥을 주었고, 그 며칠 전에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함께 다녀왔다. 카라마츠와 사소한 일을 함께 해 나갈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말 한 마디면 할 수 있다. 여섯이 아닌 둘만의 시간이 무서울 정도로 늘어간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쉽게 가까워져도 되는 건가. 카라마츠는 무슨 생각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걸까. 마음 한 구석이 어린 들꽃처럼 시시각각 쑥쑥 자라나고 흔들렸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언제나 들떠 있었고, 그만큼 불안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집에 있었으면 더 편했을 텐데.”

 “고양이랑 놀았어.”

 “그래? 다행이네. 이곳에서도 뉴 프렌드를 만났나 보군. 인연은 소중하지, 인연이 아니라 묘(猫)연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하하. 그런데 고양이와의 해피한 타임을 내가 빼앗은 건가.”

 “…갔어. 우리도 가자.”

 “묘연이라 행적도 묘연해진 건가. 하하하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벅지를 세게 걷어찼다. 카라마츠가 끄악,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부여잡았다. 바보같이.

 만두 형사는 꽤나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편의점 냉장고에 가득 쌓인 걸로 모자라 다른 색의 시리즈도 옆에 두세 개 더 늘어서 있었다. 빨간 색은 칠리, 노란 색은 겨자. 하지만 역시 원조인 파랑색이 가장 멋있군, 쿨하고 고독한 남성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고 카라마츠가 말했다. 그리고 만두 형사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대신 똑같이 만두 형사를 입에 물었다. 만두피는 두툼한 듯 쫄깃하고, 만두소도 푸짐하게 들어 있다. 달짝지근한 육즙이 침과 함께 입 안에 퍼져나갔다. 이런 맛이었구나. 한 달 전에 신제품으로 나왔을 때에는 먹지도 못하고 버렸는데.

 카라마츠의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이치마츠가 만두를 샀고, 답례로 카라마츠는 커피와 우롱차를 샀다. 이래서야 각자 사는 것과 별 차이 없지 않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카라마츠가 간식을 오물대는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그 애는, 어때?”


 말이 끝나고 나서야 아차 했다. 묻지 말 걸 그랬나. 요즘 여자애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카라마츠는 말을 아꼈다. 이미 상태는 많이 안 좋았고, 저번에는 십 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던 적도 있다고 들은 것 같다.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제 손위형제를 사랑하는 여자애라, 비밀로 해야만 할 일이었지만 카라마츠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치마츠 자신도 같은 고민이 있었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말이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의도가 쓰레기 같으니까 결국 틀어지려나. 여자애도 여자애였지만, 그녀와 카라마츠가 나눈 이야기 쪽이 훨씬 궁금했다. 고작 그런 걸로 다 죽어가는 여자애를 만날 생각을 하다니 자신은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다.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고. 두 사람은 서로의 혈육이자 애정의 상대를 어떤 눈길로 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마음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을까. 어떻게 말하며 서로를 보듬었을까. 지금에 와서 미칠 듯이 알고 싶어지다니 우습지도 않다.

 오소마츠. 너는 무슨 생각 하면서 카라마츠와 옥상 위에서 노닥거리고 있었어?

 다행히 카라마츠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응, 오늘은 많이 힘이 나는 모양이더군. 곧 오빠의 결혼식이라 새 옷을 샀다고 들었다. 입은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걸어 놓은 것은 보았어. 정말 예쁜 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을 하면 몸이 좋아지는 것 같다고 했어.”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위해 내려 주는 희망의 전조가 아닐까, 카라마츠는 즐겁게 떠들어대며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이지, 저번에는 그 애 오빠가 이렇게…”


 남은 만두를 한 입에 우겨넣은 카라마츠가 무언가 설명하며 팔을 크게 벌렸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 헤엄치던 손이, 이치마츠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심장에 망치가 내리꽂히는 줄 알았다. 

 잠깐, 이 정도 스치는 건 뭐 매일 있는 일이잖아. 사내놈 여섯이 좁은 집 안에서 뒹구는데, 서로 똥까지 다 튼 사이인데, 손 부딪히는 것 정도야. 하지만 몸은 전혀 그렇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미안하군, 가벼운 사과와 함께 돌아가려는 손을 붙들었다. 온기가 이치마츠의 손 안에 가득 들어왔다. 봄볕 같은 거 보다 훨씬 더 따스한 것이. 사내자식 살갗이 뭐가 좋다고, 생각은 여전히 힘이 없었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대다, 곧 서서히 힘이 풀리는 카라마츠의 손가락 쪽이 훨씬 더 중요했다.

 손을 뗄 수가 없다. 카라마츠의 눈빛이 의문에서 당황으로, 당황에서 다른 무언가로 시시각각 바뀌어갔다. 그때마다 세상의 색이 달라졌다. 선명해지고, 또 선명해져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쩐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시야의 중심에 카라마츠가 있다. 카라마츠의 색이 세상으로 뻗어나가고 자신을 물들인다. 

 부탁이야. 피하지 말아 줘. 

 시작은 내가 아니라고 해도,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지금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되는 거니까. 자신의 마음조차 몰라 강제로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버린 이런 쓰레기 같은 나이지만, 제발. 다시 한 번 너에 대한 마음을 시작하게 해 줘. 다시 다가갈 수 있게 해 줘.

 눈만 몇 번 깜박이던 카라마츠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웃었다. 조금 쑥스럽게.


 “이치마츠여.”

 “…응.”

 “오랜만에,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좋아.”

 “그래, 그러면 가자.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꼼질대며 움직이던 카라마츠의 손이 이치마츠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그제야 이치마츠는 손에 땀이 흥건하게 차올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불쾌하지 않을까. 하지만 카라마츠는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손을 꼭 쥐었다. 심장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정말로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빛나고, 아까웠다. 







 “여어 카라마츠으. 뭐해애?”

 “아니, 마미에게서 화분에 물을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머니의 화분은 무신경한 아버지와 혈기왕성한 형제 여섯이 위험천만하게 돌아다니는 집 안에서 용케도 생존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련한 화분들을 지키기 위해 내린 특단의 방어책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화분의 서열을 아버지 아래, 여섯 아들 위로 정했고 화분의 안전에 그 어떤 위해라도 가할 시에 응분의 조치가 따를 것이라 선언했다. 선언은 결코 헛되지 않아, 화분에 몰래 술을 버리거나 오줌을 싸거나 담뱃재를 터는 행위가 발각된 다음 날이면 형제들의 식탁에는 건강식을 빙자한 드넓은 풀밭만이 펼쳐졌다. 항의를 해도 너희는 식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그러니 풀을 먹으며 반성하세요! 라고 반박당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형제들은 화분의 식물들이 자신들보다 서열이 높다고 인정하고, 가끔씩 화분님을 청소하거나 물을 공양하며 소소한 용돈벌이를 했다.


 “헤에, 부탁?”

 “개당 백 엔.”

 “부탁이 아니잖아! 나도 할래! 할래할래할래!”


 카라마츠는 물뿌리개를 빼앗으려 덤비는 오소마츠를 잘도 피했다. 개당 백 엔, 열 개면 천 엔! 천 엔이면 파칭코나 경마장 가서 한판 할 수 있지! 이런 대박 기회를 놓칠까 보냐!


 “아무리 오소마츠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 일은 마미가 나에게 부여한 신성한 업무!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오늘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원천을 얻게 될 소중한 노동!”

 “너 지금 진짜 아프거든! 치사하게 굴지 말고 오백 엔씩 나누자고! 다섯 개만 하면 되잖아! 아니 사실 네가 열 개 다 하고 돈만 나눠도 상관없지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천 엔을 얻고 싶다면 마미에게 다른 일을 부탁해라!”  

 “웃기고 있네, 너나 나나 다 니트거든! 일하지 않는 자 먹지 말라고 할 처지가 아니거든!”


 손을 뻗었지만 카라마츠는 요령 좋게 물뿌리개를 쑥 들어 올리며 오소마츠를 피했다. 물이 떨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해죽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약이 올라 다리를 뻗었다. 발을 밟힌 카라마츠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렸고, 오소마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프다며 실컷 발을 구르던 카라마츠는 달려드는 오소마츠를 향해 어딜 감히, 라고 외치며 물뿌리개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수십 개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물줄기들이 오소마츠를 덮쳤다. 찬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차가워어어어어어어어어!”

 “아, 이런, 오소마츠, 미안.”

 “이 자식이 이제 형에게 물을 뒤집어씌우네! 동네 사람들! 억울합니다!”

 “사람의 일거리를 빼앗으려 들다니 물을 뒤집어써도 싸다!”


 카라마츠는 팽하니 돌아 다시 화분에 물을 뿌렸다. 흙이 젖은 걸로 세어 보았을 때 여덟 개 째다. 으악, 뭐야, 정말로 다 해 버릴 기세? 형한테는 백 엔도 안 넘길 거야?!


 “카라마츠으! 다섯 개는 내가 했다고 해 줘! 아니 한 개만이라도! 돈 받으면 백 엔만!”


 매달리는 오소마츠를 한 손으로 능숙하게 밀어내며, 카라마츠가 마지막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오소마츠를 돌아보며 사악하게 히죽 웃었다. 우와아아아아 열 받아!


 “너무해! 형에게 물 뿌리고! 백 엔도 안 주고! 혼자 용돈벌이 다 하고! 형아가 이렇게 애타게 애원하는데 들어 주지도 않고! 카라마츠 요즘 애정이 식었어!”

 “지금의 나에게는 카라마츠 걸에게 줄 애정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진짜 이 자식 왜 이렇게 단호박을 쳐먹었어! 오소마츠는 바닥에 흐늘흐늘하게 쪼그려앉았다. 카라마츠 미워. 바보. 나르시스트. 사이코패스. 꼴사나워. 평생 망할 탱크톱에 망할 바지에 망할 구두나 신고 돌아다니다가 감기에나 걸리라지.

 한창 투덜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앞에 방금 물을 받아 축축한 화분이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저번에 쥬시마츠가 오줌 싸서 말려 죽인 녀석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은 기억 나지 않는 작은 식물의 가지마다 연한 초록색의 어린 이파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응, 봄이구나, 확실히 봄이네.

 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카라마츠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병원에 다녀 올 때마다 엿보이는 어두움 같은 것이 한동안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다녀왔을 때에는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여자애와 그녀가 결혼식 때 입을 옷의 이야기를 먼저 조잘댈 정도였다. 보통은 물어보지 않으면 그런 거 하~나도 안 알려 주는데 말이지.


 “아, 걘 요즘 어때?”

 “나도 요 며칠간 못 만났다. 아마 내일인가, 오빠의 결혼식이라 많이 바쁜 것 같던데.”

 “헤에. 결국 하는구나, 결혼. 음식 맛있는 곳이려나.”


 있지, 너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여자애랑 너랑 여러 가지로 공통된 화제가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형아는 무지 궁금하거든! 너는 나에 대해 그 여자애한테 어떻게 말했는지! 카리스마레전드인간국보인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걸 넘어서 카라마츠가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다 포기하게 된 건지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알면, 분명 확실하게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자기 손을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은 오소마츠 자신의 인내심보다 더욱 거세게 뛰어다녔다. 신경 쓰이는 수준을 넘을 정도로.

 미안하다, 이치마츠. 형아는 비길 생각 전혀 없어요. 네가 저번부터 카라마츠와 같이 있으려고 부쩍 들이대는 건 알고 있지만, 무려 그 이치마츠가 병원에도 함께 다녀온 모양이지만, 장남은 장남이라는 것 자체가 어드밴티지거든. 나는 카라마츠의 유일한 형이거든! 

 창고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아까 카라마츠가 물뿌리개 돌려놓겠다고 갔는데. 오소마츠는 창고 안쪽으로 고개를 빠꼼이 들이밀었다. 물뿌리개는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창고 탁자 건너편으로 무언가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오소마츠가 바로 등 뒤로 다가와도 카라마츠의 기묘한 스트레칭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카라마츠으. 뭐야아?”

 “아, 저번에 마미가 사 온 영양제도 들고 오라고 했는데, 바닥에 떨어져서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손이 닿지 않는군.” 

 “어, 잠깐, 봐봐.”


 손이 먼저 뻗어나갔다. 카라마츠의 등이 닿았다. 조금 더 팔을 내밀자 단단한 몸이 오소마츠의 품에 가득 찼다. 아주 잠깐 뒤, 온 몸으로 묵직한 감각들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내가 저 녀석을 뒤에서, 껴안은 것 같잖아. 아니 진짜 껴안은 거네?

 사내자식의 시큼한 땀내가 났다. 아, 미칠 것 같아. 심장이 벌떡벌떡 뛴다. 세상으로 열려 있던 감각들이 하나하나 사라졌다. 남은 것은 카라마츠의 온기, 카라마츠의 소리, 카라마츠의 질량, 카라마츠의 색깔뿐이다. 세상 속에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단 둘만 존재하는 기묘한 감각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왠지 즐거웠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대었다. 이미 맞닿은 몸이 한층 더 가까워지며 심장소리가 톡톡 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가 움찔대다, 손을 멈췄다. 가까이에 있는 옆얼굴에서 진한 열기가 흘러나온다. 아, 이 녀석, 의식했구나.

 의식했다는 건, 너에게도 아직 채 누르지 못한 게 있다는 거지?

 나를 좀 더 의식해 줘. 그리고 인정해. 네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겨우 한두 달 만에 쉽게 씻어낼 수 없었던 거라고. 오히려 누르고 감추는 동안 더욱 커져서, 아주 조금만 틈을 주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올 거라고. 어떻게 아냐면, 내가 지금 그렇거든. 참으려고 했는데 너를 제대로 한 번 가져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거든.


 “오소마츠.”

 “왜 그러십니까, 카라마츠 씨.”

 “조금만, 팔을 더 뻗으면…닿을 것 같은데.”

 “어디이….”


 손이 카라마츠의 팔위를 기었다. 카라마츠는 움찔대기는 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소마츠가 마침내 손목을 지나 손을 겹쳤을 때는 좀 긴장한 모양이었다. 응, 괜찮아. 형아도 지금 되게 떨리거든. 너도 들리지, 내 심장소리?

 카라마츠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을 끼워넣으며, 오소마츠는 구석에 처박힌 영양제 쪽으로 손을 뻗었다. 노골적인 헛손질인데도 카라마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닿을 대로 닿은 몸이 서로를 누르고, 작업복 위로 올라온 뜨끈한 체온이 얽혔다.  

 왠지 심장 소리가 두 개,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거울 속의 자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이 멍청한 얼굴로 눈만 끔벅일 뿐이다. 거울이니까 당연한가. 카라마츠는 몇 번인가 더 머리를 굴리다, 결국 거울을 놓아 버렸다. 자신의 퍼펙트 페이스를 보아도 심란함을 떨칠 수 없었던 적은, 이게 아마 두 번째일 것이다. 한두 달 전에 비밀스런 대형 사고를 겪었을 때 한 번 있긴 했다. 지금도 충분히 대형 사고라고 생각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죄가 많은 거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은 자꾸 과거를 더듬었고, 걱정이 함께 올라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던 걸까. 형제,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에게. 분명 마음을 접고 형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에 다짐이고 뭐고 모두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차라리 처음으로 되돌아갔다면 그나마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 때 자신은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게 두 사람 분이 되고 말았다. 근친상간, 동성애, 양다리, 어장관리. 어머니와 온갖 욕을 하며 보던 드라마의 부정적인 클리셰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치마츠와 손을 잡은 것은 정말 충동적이었다. 이치마츠는 근 한 달 만에 말을 걸어 준 이후로 어쩐지 계속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동생과 친근하게 지내는 일을 마다할 리는 없었고, 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치마츠가 다가와 준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라마츠 쪽에서도 이치마츠를 불러내고, 단 둘만의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이치마츠는 조금 소극적이긴 해도 잘 웃었고, 서툴긴 해도 최대한 말을 붙여왔다. 물론 전처럼 짖궂게 굴거나 꽤 강경하게 나오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그런 모습 모두가 이치마츠의 것이라 생각하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중하고, 즐겁고, 어쩐지 다음에 둘만 보낼 시간이 기대되고, 그리고, 손을 잡혔을 때에도, 싫지 않았다. 분명 얼마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오소마츠에게 모든 마음을 다 주어서 이치마츠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애정을 줄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손을 마주잡았을 때 마음을 두드렸던 감정은, 어쩐지 달짝지근하고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것이었다. 마치, 소녀들이 좋아하는 만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그런.

 그런데, 오소마츠가. 

 좋아하는 마음은 다 지우고 묻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일이 있었던 이후에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여자애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고 물어오는 것도, 머리를 말리며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함께 노래를 불러 주려고 했을 때에도, 분명 타인의 시련에 마음 아파하는 동생을 위한 형의 배려라고 믿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는데. 중요한 것은 둘이 그 시간을 공유했다는 사실이지, 여자애에 대한 것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오소마츠 역시 그렇게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왜 그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 결국 창고에서 참고 있던 것들이 다시 튀어나왔다. 오소마츠도, 자신도. 오소마츠는 분명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었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등에 오소마츠의 무게가 실려 왔을 때, 팔위로 손이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손을 감싸 쥐었을 때, 온 몸의 힘이 오소마츠 쪽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다 내던지고 모든 것을 오소마츠에게만 내맡기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은 이렇게 강했던 걸까. 지금까지 어떻게 이런 걸 누르고 있었던 걸까. 카라마츠는 결국 오소마츠를 떨어내지 못했다. 손이 붙들린 채, 오소마츠만을 느끼며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어쩌지, 어쩌면 좋지.

 마음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격하게 흔들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두렵고, 떨리고,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뻗어나가는 사랑스러움과 격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카라마츠의 가슴 속을 홱홱 지나쳐 갔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저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저 두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한때 묻어 둔 감정들이 제멋대로 폭주해 나를 착각에 빠트린 걸까. 정말 좋아하는 거라면 어떻게 하지? 많은 것을 다 뒤로 밀어 둔다 해도,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마음을 주는 건 둘 모두에게 못 할 짓이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건 길티 가이라며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진짜로, 죄다.

 휴대전화가 바들바들 떨었다. 복잡하게 얽히던 머릿속이 살짝 깨어났다. 무슨 일일까, 설마 형제들 중 누가 늦게 오는 걸까. 카라마츠는 팔만 뻗어 휴대전화를 끌어당겼다. LED가 깜박이는 걸로 보아 뭔가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눈을 두어 번 굴려 짧은 글을 읽었다. 그리고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애의 부고가 액정 화면 안에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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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
2016. 3. 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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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0)/14(0)편을 읽지 않아도 이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은 없도록 했습니다만, 성인분이시라면 2편/8편/14편을 읽기 전 먼저 2(0)/8(0)/14(0)편을 읽으시는 쪽을 권장합니다. 미성년자 분들은 다음 기회에.

2(0)/8(0)/14(0)편 비밀번호는 이 책(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17813)의 ISBN번호 끝 4자리입니다.

* 원작 16화에 영향을 받아, 1~5화와 6화 사이의 이치마츠에 대한 서술이 달라졌습니다. 앞부분은 캐붕이 없으면서도 이야기의 전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주 천천히 고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1편은 10편에서 선을 잡지 못한 오소마츠의 시점으로 진행합니다.

 

호감도 결과: 599

1차 결과-오소마츠 514, 이치마츠 486

2차 결과-오소마츠 361, 이치마츠 639

3차 결과-오소마츠 599, 이치마츠 401

총합계-오소마츠 1,474, 이치마츠 1,526(차이 52)

총 호감도 3000, 10% 보정범위 300. 현재 보정범위 이내입니다.

차회부터는 보정범위를 5%로 축소합니다.


전개를 위하여 오소마츠의 행동을 추가 지정합니다.

10 이하-물어본다/10 이상-묻지 않는다

결과: 19-묻지 않는다

누구에게? 홀 이치마츠 짝 카라마츠

결과: 9-이치마츠


 

 바닥에 누워서 읽고, 앉아서 읽고, 엎드려 읽어 보았다. 각각 서른 번 정도. 음, 그러니까 둘이 뭘 사러 갔었단 말이지. 정말이었지만. 캣푸드랑 포테토칩을 사 왔을 뿐이지만. 하지만 둘 다 표정은 좋았고, 특히 이치마츠는 답지 않게 기분이 좋아 보여서 역으로 신경 쓰였다. 형아가 없는 사이 너흰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니. 하긴 뭐,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했겠지. 뭔가 제법 엄한 전개가 있었다면 너희가 그렇게 멀쩡한 표정으로 들어 왔을 리가 없으니까. 기분이 상당히 싱숭생숭했다. 봄이라서 그런가, 이 밤을 함께 불태울 예쁜 영상 속의 여자 친구라도 찾아보아야 하나. 무엇이든 다 내키지 않았다. 

 응, 역시 카라마츠가 아니면 안 되겠어.

 오소마츠는 시원스럽게 긍정해 버렸다. 그리고 곧 다시 한 번 바닥을 뒹굴었다. 카라마츠가 아니면 뭐 어쩔 건데? 내가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카라마츠가 마음을 돌려서 오소마츠 나랑 사귀어 줘! 하고 외치기라도 하나? 한 번 죽었다 생각했다가 되살아난 마음이라 더욱 컨트롤하기 힘들다. 자의식은 내 손에서 마음대로 굴릴 수라도 있지, 연애감정은 뭐야 이거. 봄이 오니까 더욱 싱숭생숭해지기만 하고. 에라이 차라리 돈이나 버는 게 낫겠다. 누구 지갑에서 파칭코 갈 돈을 얻어내 볼까, 오소마츠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경기할 뻔 했다.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펄쩍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뭐야뭐야뭐야뭐야, 형아 놀랐잖아! 방금 전까지 뇌수를 절이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안 놀랄 사람이 어디 있어! 오소마츠는 방금 전까지의 자신이 헛소리를 흘리지는 않았는지 기억을 단단히 점검해 보았다. 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지 아무 말도 안 했구나. 장하다 나. 장하다 장남의 위기 감지 능력. 


 “뭐야 카라마츠, 형아 심장마비 걸리게 하려고? 혹시 암살자로 인생 목표를 바꾼 거야? 음, 형아는 그런 살벌한 직업보다 그냥 카라마츠가 아픈 편이 나은데에.”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아, 대단히 건강하다 오소마츠.”

 “응, 그런 거 좋아, 아주 좋아해. 그런데 카라마츠, 오늘은 어디 안 나가? 병원은?”

 “오늘은, 웨딩 촬영을 하는 날이라더군. 아마 모레쯤에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웨딩 촬영은 할 수 있대? 휠체어 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의사 선생님도 말리긴 했지만 본인의 주장이 상당히 강했던 모양이야. 아마, 음, 거의 마지막 소원이 될 테니까.”

 “마지막 소원이면 마지막 소원이지, 거의 마지막 소원은 뭐야 또.”


 카라마츠가 쓰게 웃었다.


 “마지막 소원은, 오빠의 결혼식장에 참석하는 것이라더군.”


 아, 그런 거라면 뭐. 오소마츠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병원 근처에만 갔었지 여자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생명이 꽤 위태하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그 여자애를 만날 때마다 카라마츠가, 새카매져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카라마츠는 감각이 제멋대로이다 못해 머릿속이 뻥 뚫려 있고 형제들 중 제일 다정하다. 같은 마음을 짊어진 여자아이가 자신의 눈앞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모습을 쉽게 떨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잘 버텨 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과 동조해 버리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 카라마츠는 어느 쪽이냐면 전자다. 슬퍼하고 다독일 수는 있지만 그 아픔을 구분 짓고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버릴 줄도 안다. 누구보다도 이 형아가 직접 당했, 보았으니까 절대 틀릴 리가 없지. 형아의 동생 파악력은 대단하다고!

 카라마츠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씁쓸한 눈빛은 이미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래, 이래야 카라마츠지. 멱살을 잡혀도 무시당해도 맷돌을 맞아도 금방 회복하는 게.


 “그래서 오늘은 프리한 타임이 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카라마츠 걸을 만나러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군. 뭐, 집에서 봄의 spring의 바람의 wind를 맞으며 새롭고 brand-new한 여신 muse의 속삭임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음, 그래 그러니까 옥상에서 노래를 부르겠다 이거구나. 이치마츠가 집에 있었다면 아마 고양이 특공대라도 보냈겠지만 다행히 오늘은 오소마츠밖에 없다. 다른 애들은 뭐, 알아서 잘 돌아다니고 있겠지. 특히 쥬시마츠. 카라마츠가 옥상에서 망한 콘서트를 시도할 때 게스트로 초대하는 그 쥬시마츠가, 없다. 이거 기회인가? 기회라고 봐도 돼?


 “카라마츠으.”

 “응, 오소마츠? 오소마츠도 함께 muse의 속삭임을 체험하고 싶은 건가?”


 우와, 어떻게 알았대애. 방금 전까지는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생겼습니다 생기고말고요. 일단 뮤즈가 뭐더라, 아 그래 TV에서 들었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의 여신이라고. 그리스에 산다는 여신님이 겨우 카라마츠의 노랫소리 같은 거에 끌려 일부러 일본 도쿄 아카츠카 구 구석에 처박힌 집 옥상으로 강림할 리는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되어 주지, 그 여신인가 뭔가. 우와아 낯간지러워! 내가 해 놓고도 정말 부끄러운 말이네! 카라마츠에게 옮은 건가! 내가 카라마츠화 되어 가는 건가! 젠장, 미치겠다 진짜.

 한 번 막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전혀 막힌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하루하루가 여러 가지 의미로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신경이, 시간의 모든 것이 카라마츠를 향했고 심지어 꿈자리도 좀 뒤숭숭했다. 두 달 전이었다면 분명 아무 거리낌 없이 몸으로도 나타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묘하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자신은 한 번 거절당했다. 그것도 정식으로. 아주 제대로. 머리는 그 막막한 시간을 기억했고, 그래서 뻗어나가는 마음을 두려움으로 매달아 잡아끌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아주 아무 데도 못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카라마츠가 구석에 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 진짜 노래 부르려나 보다. 이거 원, 옆집에서 또 한 소리 듣겠네, 엄청 시끄럽다고. 알 게 뭐냐, 사내자식 여섯 있는 집 옆에 들어왔으면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지.


 “뭐, 궁금하긴 하네. 그거 어떻게 내리는 거야? 막 귀신 들리는 거?”

 “오소마츠, muse는 여신이다. 귀신같은 게 아니야.”

 “헤엥, 신이나 귀신이나.”

 “무슨 말인가. 여신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내려 주는 존재. 잡귀신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이지.”

 “아, 그래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어떻게 듣는 거야, 그 muse의 속삭임이라는 건?”

 “어, 진짜? 같이 할 거야?”


 당황한 건지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튀었다. 오소마츠는 앞으로 쓰러졌다.


 “으하하하하하하! 뭐야아아아아 카라마츠으으으으! 으힉, 우하하하하, 푸히히히히히! 너 지금 그거 대박 웃겼어!”

 “우, 웃지 마! 좀 놀랐을 뿐이야!”


 그야 그렇겠지 뭐, 쥬시마츠 말고는 같이 노래하러 가자고 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오소마츠는 킬킬 웃으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카라마츠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오소마츠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저번에 머리를 말려 주었을 때 이후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평범한 접촉을 피하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게 된 걸까, 형아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래, 가자. 어디 여신님이 강림하시나 지켜 보자고.”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너를 홀릴 muse가 내려오면 내가 쫒아낼 거니까.







 욕실로 쳐들어갔을 때에도 솔직히 뭘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 때엔 그랬다. 뭐 자신이 생각하고 움직였던 적도 별로 없었고, 그런 얼굴 한 카라마츠를 홀로 두면 형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실격이다. 어두운 현관에 서서, 카라마츠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정으로 자신을 푹 절이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어. 불러 세워 붙들었는데도, 분명 형제들을 알아보았는데도 그림자는 카라마츠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아 정말 싫어. 카라마츠, 난 진짜 다 괜찮아, 네가 망한 탱크톱을 입어도 어울리지도 않는 컬러렌즈를 끼고 다녀도 이치마츠랑 잤어도 나에게 사랑을 주려다 빼앗아갔어도. 하지만 네가 내 손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가는 건 싫어. 내 손이 닿고,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다행인지 아닌지 카라마츠는 멀쩡히 몸을 씻고 있었을 뿐, 욕실에서 미끄러지거나 뜨거운 물 안에서 피를 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도 단호한 반응이 돌아오는 걸 보니 확실히 추스른 게 맞다. 하긴 뭐 우리 차남이 이 정도로 사고를 치거나 그럴 애는 아니지. 셋의 감정이 얽혀 정신이 없었던 한 달 전에도, 카라마츠는 그 난리통 속에서 홀로 결론을 찾고 모두의 길을 결정해 버렸다. 일단 그래야 한다고 결심하면 카라마츠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 카라마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부대끼며 형제로 살아가는 거지.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넌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 카라마츠에게보다는 자신에게 수십 번씩 되물으며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벗은 등을 슬쩍 훔쳐보았다. 거의 매일 목욕탕에서 보고 있지만, 왠지 둘만 있는 공간에서 무방비한 맨몸을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더 임팩트가 컸다. 그 동안 같은 공간에 두 사람만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한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 보며 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잖아, 우리.

 카라마츠는 정말로 태연했다. 그렇게 보였다. 연극부 경험은 어딜 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일주일 정도는 오소마츠와도, 이치마츠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세 사람의 관계가 잠깐 꼬였더라는 사실이 뒤늦게라도 알려지면 집안 분위기가 아주 이상해진다. 다들 동정을 떼고 싶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형제라면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 테니까. 셋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어도, 셋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 오소마츠도 카라마츠처럼 필사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해야만 했다. 솔직히 힘들었다. 인간국보급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진즉 때려치웠을 텐데. 이치마츠야 너는 조옿겠다아. 시커멓게 있어도 다들 그러려니 해서.

 특히 모든 것이 한 순간 정리된 바로 다음 날이 제일 힘들었다. 전날 밤에는 한 몸이 되어 그렇게 격하게 움직이던 상대였는데 이젠 형제간의 접촉조차 한 번 생각하고 진행해야 하다니 정말 어려웠다. 다행히 마음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약해져 갔고,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카라마츠의 알몸을 봐도 별 감흥이 없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형아 대단하지, 응? 모르지 또, 몇 달 정도 더 지나면 정말 감흥이 없어질 지도. 진짜라니깐.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오소마츠는 장남답게 많은 것을 멋지게 참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카라마츠와 병원의 여자애에 대한 말을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다녔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렇게 제 마음을 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닿고 싶어. 카라마츠에게 닿고 싶어. 형제가 아니라 그냥, 카라마츠에게 닿고 싶었다. 껴안는 것만으로도, 아니 손만 잡아도, 아니 손끝만 스친대도 상관없으니까. 단 둘이 꽤 원초적인 모습으로 같은 공간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굉장한 효과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굳었다고 생각했던 심장 어딘가가,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지고 격하게 떨렸다.


 “이리 와, 카라마츠. 머리 닦아 줄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쨌거나 몸은 수건을 집어 들고 카라마츠의 머리를 말려준다고 선언했다. 카라마츠는 머리를 늘 스스로 말린다. 그놈의 퍼펙트 헤어스타일인지 뭔지 때문인가 보지만, 팔을 붙들어 앉히자 카라마츠도 강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남의 머리, 말려주는 건 처음인데. 뭐 알 게 뭐냐, 나 말리는 것보다 조금 살살 하면 되겠지. 보송보송한 수건이 카라마츠의 습기로 함빡 젖어 들어갔다. 눅눅해진 천 조각 아래로 머리카락 덩어리가 이리저리 쏠렸다. 동그란 머리의 곡선이 손끝에서 미끄러져 갔다. 이렇게 머리가 동그랬던가. 그야 매일 악다구니를 쓰고 있어도 서로 머리를 이런 식으로 만져본 적은 없었으니까. 이십 년 간 모르고 있었던 감각이 손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다. ‘그 때’에도 이런 식으로 만지진 않았는데.

 카라마츠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아, 뭐야, 이거. 가슴이 지금 쿵, 했어.

 푹 젖었다 말라가는 몸에서 따뜻한 물 냄새가 났다. 곧은 목덜미가 발갛고 촉촉했다. 수건 아래 머리카락은 딱히 부드럽지는 않지만 손가락에 감겨 올 때 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간지러웠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자국을 내고 싶다. 마음껏 간질이고, 깨물어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손이 마음대로 머리 선을 따라 귀를 스쳤다. 아, 야들야들하네, 이거. 순식간에 목덜미로 흘러간다. 카라마츠가 파륵 몸을 굳혔다. 목덜미가 좀 더 발개진 것도 같다. 

 이게 뭐야.

 나, 이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니었어?

 카라마츠가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소마츠도 놀라 손을 떼었다. 카라마츠의 움직임보다 자기 자신 쪽이 더욱 놀라웠다. 아, 잠깐만, 오소마츠. 진정하자. 일단 생각하지 말아 봐. 땀과 열에 젖어서 싸구려 시트를 그러쥐던 카라마츠의 목덜미가,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팔딱팔딱 떨던 팔의 근육이, 손아래에서 차지게 튀던 허리가, 아니지아니지아니지.


 “오소마츠, 고맙다. 이제 그만….”


 카라마츠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지인짜 다행이야. 오소마츠는 수건을 꾹 쥐었다. 횽아도 너도 지금 되게 위험했다, 알아 둬 카라마츠. 좀 더 만지고 싶은데, 좀 더, 좀 더, 아 진짜 관둬! 오소마츠는 수건을 멋대로 휘휘 돌렸다. 패대기를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했다. 다행히 그놈의 KARAMATSU☆PERFECT☆HAIRSTYLE☆선언이 홀로 미쳐 날뛰려던 기억을 힘 있게 눌러 주었다. 아, 카라마츠, 정말 너란 녀석은. 난 이래서 네가 정말 좋아. 아마 네가 나를 좋아하기 이전부터 난 너를 좋아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지금 와서 깨달아봤자 의미 없지만. 오소마츠는 낄낄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도 말야.”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카라마츠는 힘들어도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어디로도 가지 않고, 형제들의 옆에 있어 줄 것이다. 알지도 못했던 여자애에게 받아든 어두운 생각 보다 우리의, 카라마츠의 마음이 훨씬 더 강하다. 형아는 그렇게 믿을 거야.


 “다행이네, 괜찮아진 것 같아서.”


 카라마츠가 살짝,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문을 열자마자 쪼그려 앉은 이치마츠가 보였다. 오소마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이치마츠가 손에 든 것을 뒤로 숨기며 불안하게 오소마츠를 올려다보았다. 발끝을 꼼질대는 모습이 꼭 잘못해 벌 서는 아이 같다. 뭐야 형아 카라마츠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너한테 뭐라고 할 생각도 없고. 이상하게도 이제는 이치마츠에게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카라마츠를 두고 서로 날 세우던 때가 있었는데, 아 몰라 기억 안 나. 이치마츠의 등 뒤에서 유리병이 달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오소마츠는 이치마츠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우유, 좋아할 거야.”


 이치마츠 이 바보 녀석. 그거 아까 목욕탕에서 받은 우유잖아. 아저씨가 한 사람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다섯 개 남은 걸 나눠 줬던 그거잖아. 어째 바로 안 마신다 했더니 이런 깜찍한 짓을 하려고 했던 거냐. 그래, 잘 했어. 우유 좋아할 거야. 네가 한 달간의 시커먼 것을 털고 일어나 말을 걸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카라마츠는 좋아할 거야. 되도록 웃어 주고 싶었지만, 그것까지는 좀 힘들어서 오소마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복잡했다. 그 때 치비타의 오뎅 포장마차에서, 이치마츠는 분명 칼같이 마음을 떨구어낼 수 없다고 그랬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상태인 걸까. 단순히 카라마츠를 마주 대하게 될 용기가 생긴 걸까, 아니면 다른 걸까. 다른 거라면,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조금 큰 비명소리도 울린다. 오소마츠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그러지 말자. 이치마츠에게도 기회는 필요하니까.







 봄의 하늘은 아직 살짝 빛이 바래 있었지만, 온 공기에 따뜻한 햇살이 넘실대었다. 나지막한 집들 너머 먼 곳의 큰길에 사람들이 여럿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확실히 바깥에 나가기에 좋은 날씨네. 애들이 놀기에도, 친구끼리 뛰어다니기도, 데이트하기에도. 응, 이게 데이트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오소마츠는 턱에 손을 괴었다. 바람이 목을 살짝 감싸다 달아났다.

 오소마츠의 옆에 걸터앉은 카라마츠는 묘하게 진지한 표정으로 기타의 줄을 만지작대었다. 카라마츠의 손가락이 줄 위를 뛰어다닐 때 마다 가지각색의 음이 줄을 이어 들려왔다. 꼭 물 아래에서 신이 나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처럼. 같은 얼굴인데, 이상하게 카라마츠의 얼굴은 좀 더 선이 굵은 것도 같다. 다른 형제들보다 좀 더 짙은 눈썹 때문인가. 평소에 폼 잡는답시고 눈에 힘을 주고 있기도 하고. 

 바람이 눈에 들어간 건지, 카라마츠가 느리게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흔들리는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보인다. 눈을 떠 하늘 어딘가를 헤매는 시선이, 평소와는 달리 웃음기도 허세도 없이 세상을 대하는 얼굴이, 낯설고, 또, 뇌에 콱 들어박히는 것 같아서.

 오소마츠는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아주 잠깐 허공을 헤매던 몸이 지붕 위에 완전히 얹혔다. 응, 하늘은 파랗네. 햇빛은 반짝반짝하고. 사실 뭐 흐려도 좋고 비가 오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카라마츠.”

 “그래, 오소마츠.”

 “카라마츠으.”

 “왜 그래, 오소마츠. 나 어디 안 간다. muse도 아직 강림하지 않았고.”


 카라마츠가 어디 안 가니까. 내 옆에 있으니까. 이미 한 번 밀려난 마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르면 카라마츠가 대답해 주니까. 날씨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말이지.

 이치마츠랑, 어떤 이야기를 했어?

 우유까지는 한 번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 이치마츠는 놀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왔다. 아니지, 이미 적극적이었던 거야 그 녀석. 그걸 남겨 와서 카라마츠에게 주려고 했던 것부터가 이미 시작이었던 거야.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카라마츠를 붙들고 둘만 편의점에 나갔다 오다니, 장족의 발전 아닐까. 이치마츠 같이 솔직하지 못한 녀석에겐. 그러니까 너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어? 왕복 10분, 물건 사는 데 5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치마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너는 어떤 말을 해 주었을까?

 카라마츠에게 물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들으면, 자신도 같은 말을 카라마츠에게 해 버릴 것 같다. 그러면 재미없지. 이치마츠도 나름 용기를 내어 카라마츠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오소마츠니까.


 “카라마츠.”


 시야가 어두워졌다.

 태양 대신, 카라마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세상에, 이거 좀 위험해.

 손이 뻗어나간다. 카라마츠의 뺨 가까이로 다가간다. 조금 버석버석해 보이는 입술이 유난히 빨개 보인다. 카라마츠, 말 하지 마. 너 말 하면 입술 움직일 테고, 그러면 나 진짜 힘들어져. 카라마츠가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속눈썹은 여전히, 길다. 잠깐, 잠깐만. 너 얼굴 완전 긴장 풀렸잖아. 힘주어 폼 재는 얼굴도 얼빠지게 징징대는 표정도 아니고, 그냥 편안한, 뭔 짓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손이 멈추질 않는다. 오소마츠, 진정하자! 여기서 삐끗하면 카라마츠 정말 도망간다고!

 손이 카라마츠의 머리 위에 얹혔다.

 우와, 성공!


 “오소마츠?”

 “응, 생각해보니 착해서 칭찬 좀 해 주려고. 아직도 그 여자애 위로해 주러 다니다니 착해.”

 정말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지만, 카라마츠의 표정에 조금 더 그늘이 졌다. 이것도, 떨어낼 수 있는 그런 거지? 저번처럼.


 “…뭐, 그건 딱히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엉?”

 “아, 아니다. 오소마츠, 누슨 노래를 듣고 싶나? 마침 자작곡을 만들어 둔 게 있긴 하지만, 오자키 노래라도 상관없어.”


 지금 누가 듣고 싶겠냐, 오자키 노래! 방금 전까지 진짜 좀 위험했는데, 역시 너답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산통을 다 깨 버리고 말이지. 왠지 방금 전까지 있었던 내면의 격렬한 투쟁이 바보 같아졌다. 아니 뭐 카라마츠가 바보 같은 게 한두 해 일도 아니고.


 “아무 거나 해 봐, 다 비슷할 것 같으니까.”

 “엣, 너무한 거 아닌가. 모두 다 전력을 다해 서로 다른 분위기로 만들어 두었는데. 특히 가장 최근의 곡은 톳티의….”


 뭔지는 몰라도 토도마츠가 그 노래를 들으면 당장 기타를 부숴 버리겠지. 힘내라 토도마츠.


 “거기 옥상의 멍청이들.”


 발아래에서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라마츠가 화들짝 놀라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진짜 뭐야, 오소마츠는 속으로 투덜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매일 듣고 사는 목소리인데.

 손에 봉지를 든 이치마츠가, 단단히 굳은 눈길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와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데 진짜 와 버렸네. 이치마츠 생각 하지 말 걸 그랬나보다.


 “…뭐 해?”

 “오, 이치마츠인가. 오늘도 cat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온 크엑.”


 캣푸드 깡통이 허공을 날아 카라마츠의 이마에 명중했다. 우와 이치마츠 대단해 훌륭해. 어떻게 카라마츠에게 딴죽을 걸 때만 되면 저렇게 화끈해질까. 


 “내려와. 무슨 헛짓이냐.”

 “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오소마츠도 muse의 강림에 동참해주겠다고 하는 판이고크엑.”


 이번에는 이치마츠의 슬리퍼가 날아왔다. 던지는 이치마츠도 이치마츠지만 그걸 또 다 맞는 카라마츠도 카라마츠다. 오소마츠와 눈이 마주치자 이치마츠의 시선이 살짝 떨렸다. 표정이 굳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입술을 달싹인다. 응, 알아. 나도 조금 그래. 기껏 카라마츠랑 꽤 괜찮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너도 그러려고 빨리 집으로 돌아왔을 텐데. 


 “이치마츠!”

 “…왜.”

 “우리, 비긴 거다?”

 “…쳇.”

 “으, 엉? 비겨? 설마 형제끼리 무익한 경쟁이라도 한 것인가.”

 “응, 카라마츠, 그냥 거기서 기절해 있어 주라. 형아 이제 갈게.”

 “잠깐, 오소마츠, 이제 막 muse가 오려던 참이었는데!”

 “썩을마츠 너도 내려와, 쵸로마츠 형이나 엄마에게 걸리면 기타로 맞을 테니까.”


 카라마츠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기타를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오소마츠는 이치마츠에게 크게 한 번 손을 흔들어 주고, 지붕 뒤편에 있는 창문으로 몸을 옮겼다. 응, 뭐 날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노래를 못 들었으면 내일 파칭코라도 함께 가면 되겠지. 여섯 형제니까 기회도 공평하잖아, 누구에게나. 기왕이면 나에게 더 기회가 있었으면 하지만. 하지만 다음번에 카라마츠와 단둘이 있을 때를 대비해 심신 수련이 필요할 것 같긴 해.

 창문으로 몸을 들이밀기 전, 오소마츠는 뒤를 따라오는 카라마츠를 살짝 돌아보았다. 아까 살짝 드러났던 어둠은, 없다. 응, 어떻게 떨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네가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할 수 있도록 내가 어둠을 털어내 줄게. muse인가 하는 아줌마보다 더 잘 할 자신 있어, 나.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주라. 내 손에 닿는 곳에 있어 줘.

 지금처럼.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향해 웃어 주었다. 영문을 모른 채, 카라마츠가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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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미*